역사이야기 297

무장독립운동 '육혈포 암살단'

일제강점기의 신문을 보면 시기마다 다르겠지만 1920년 8월 어느날 동아일보에 나온 기사의 내용이 눈에 들어온다. 해방 이후 당시 나온 신문을 축소복사한 것인데 인쇄된 글자체는 지금과 다르고 세로로 쓰며 이어쓰기를 하고 글의 호흡이 길며 마침표 같은 것이 잘 안 보인다. 당시 미국의 의원단이 경성(서울)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 총독과 고위공직자 친일인사가 모일 것을 예상하여 상해임시정부와 연결이 되고 국내외에서 준비를 한 젊은 인사들은 권총(모젤)과 탄약을 준비 육혈포 암살단을 조직하는데 대표는 '한 훈 30세이며 서울에 거주하지만 고향이 충남 청양이라고 나와있고 그외 서일순(본적 경성부 27세) , 이운기(본적 경성부 29세), 신화수 (본적 경남 고성 24세), 김화룡(본적 평북 영변 23세), ..

역사이야기 2022.05.21

영조와 정조시대를 좋게 보기도 하지만

조선 후기 나름 자본주의의 싹이 트려고 했고 이웃 일본은 막부정치를 이어 나갔으나 상인들의 힘이 강해진다. 우리의 경우 숙종 영조 정조등 탕평책을 실시하기도 하고 왕족들은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고자 숨기도 하고 노론이냐 소론이냐 아니면 남인이냐에 따라 권력을 잡으면 왕에게 상소를 하기도 하고 상대편의 단점을 지적 사사를 단행하고(사약을 먹여 죽임), 사대문 안에서 대규모 사형을 집행하기고 했으며 변방에 나가 있는 관리가 병권을 이용할 까 불러서 사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남쪽으로 유배를 간 사람을 다시 불러 북쪽의 삼수나 갑산으로 올리고 또 제주에 유배 간 이들을 다시 불러 관직을 수여하며 지금과 비교하면 말도 안되는게 차관급 공직자를 시골의 수령으로 보내거나 찰방 같은 자리에 내려보낸다. 정국이 바뀌..

역사이야기 2022.04.25

정약용 선생과 한강수로

지금은 차를 타고 이동을 하지만 200년전엔 걷거나 말을 타거나 강으로 다니는 배를 이용해서 이동을 했다. 영남대로니 해서 서울서 동래 부산까지 육로를 이용하여 사신들이 이동하기도 했으나 지금의 도로에 비하면 오솔길 정도에 불가하고 과거나 공무를 수행하거나 아니면 장사를 하는 이를 제외한 사람들은 지역간 이동이 적었을 것이고 밤이면 산짐승이 출몰하는 곳도 많고 당시 힘든 납세나 부역을 피해 산에 숨어 사는 산적들 때문에 혼자서 길을 나서는 건 위험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다음으로 다리가 없는 강을 건너는데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시간이 걸렸을 터... 200년전이지만 당시 광주군 초부면 능내 (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에 본가가 있던 정약용선생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묘역이 있던 충주 가..

역사이야기 2022.04.09

풍수지리와 지역거점

우리나라는 수천년 동안 농업사회였다. 특히 수도작(논농사)을 기반으로 생업을 유지했고 남쪽으로 갈 수록 인구밀도가 높았으며 뒤에는 산을 앞에는 강이나 개울을 두고 사는게 풍수지리적으로 타당했었다. 풍수지리 그러면 뭔가 미신 같고 주관적인 가치를 대변하는 것 같지만 풍수라는 말은 장풍득수의 줄임말로 '바람을 막고 물을 구한다!' 는 뜻이다. 특히 찬 북서풍은 사는데 많은 고통을 주었고 물을 구하는 건 살아가는데 있어 필수로 예나 지금이나 중요하다. 그래서인지 지역의 중심지를 보면 배산임수 지역이 많고 큰 고을은 군사적인 측면까지 고려 읍성이나 산성이 있어야 하고 조세를 운반하기 좋은 곳에 위치했었다. 아랫지방의 진주, 밀양 그리고 상주, 안동, 나주, 남원, 충주 같은 지역을 보면 읍성이나 산성이 있고 강..

역사이야기 2022.04.05

이대원장군과 정 운 장군

임진왜란이 있기전에도 조선은 왜의 침입이 있었다. 왜구라고 부르던 이들 중엔 불안한 일본 본토의 백성들도 있었고 대마도와 그 인근의 주민들이 약탈을 위해 조선의 남해안 특히 전라 좌도를 침입하고 척박한 제주도에도 온다. 이 왜구는 명나라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까지 나가 약탈,방화, 살인, 납치등을 저지르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행위가 진정된 건 일본 본토를 통일한 도요토미에 의해서다. 지금의 여수 순천 고흥 강진 완도 해남 완도 진도는 이들의 침입이 더 심했고 이곳의 섬과 해안의 피해를 막기 위해 군사가 동원 되어 싸우는 과정에서 왜구의 전투력을 파악하게 되고 특히 전라 좌수영은 정비를 하게 되고 어느 정도 대비를 했던 것 같다. 왜구라고 하니 소규모의 해적이라 판단할 수 있지만 당시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

역사이야기 2022.04.04

경무대의 실세

우리 역사를 보면 대통령의 측근으로 있다가 벼락 출세를 하여 권력을 잡고 떵떵거리다 비극에 간 인물들이 있다. 대부분은 박정희를 경호하던 차지철을 생각할 것인데 차지철은 군사적인 경력과 정치적 행보를 걷다가 경호실의 수장이 되었고 당시 청와대와 관계한 장군들과 비슷한 연배이거나 선배였다. 물론 권력을 휘두르고 많은 이들의 분노를 유발한 인사로 고인이 된 상황에서도 비난을 받았다. 청와대가 있기전 경무대가 있었으며 이승만 정권 당시 부 부통령이란 별명을 갖고 있던 '곽영주'는 차지철 못지 않은 비판을 받고 5.16 이후 사형이 집행되는데 그가 사형당한 이유엔' 4.19 당시 경무대 앞 발포명령자, 당시 이정재와 유지광 같은 정치깡패를 비호, 대통령 측근에 있으면서 독재 권력의 하수인이 되고 부정축재등이 원..

역사이야기 2022.03.21

2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피해자

동유럽의 전쟁이 확산 되면 3차 세계대전이니 핵전쟁이니 해서 심각해지고 인류를 파멸에 몰아 넣을 수 있다. 2차세계대전의 경우 주축국이었던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등이 가장 많은 피해를 봤을 것 같지만 실제 사람이 가장 많이 희생된 나라는 '구소련' 지금의 러시아다. 전선의 양상이 동유럽과 함께 동아시아가 동시에 전개되는데 특히 동유럽에서의 격전은 치열했다. 인구의 약 10%가 사망했는데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군인들이 1000만이 넘고 아무 죄 없는 민간인의 사망이 1300만 이상이라고 하는 걸 보면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 추측할 수 있다. 넓은 영토와 자원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에 비해 큰 희생이 있던 공산국가 소련은 여성으로 군에 자원입대한 이들도 100만이 넘었으며 여성들 또한 지원병과가 ..

역사이야기 2022.03.04

원초적인 무기 '돌'

창이나 칼 그리고 활이 있기전 원초적인 사냥 그리고 싸움의 도구엔 돌이 있었다. 작은 돌 부터 성벽을 무너트릴 수 있는 큰 돌을 투석기에 올려 날리거나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때 물매에 돌(물맷돌)을 달아 맞춰이기기도 했는데 에너지를 키우면 엄청난 위력이 있고 '대포'라는 무기도 한자를 해석해 보면 돌을 날려 충격을 주는 것에서 시작이 되었다. 활은 화살과 활 그리고 숙련된 훈련이 있어야 했지만 돌던지기는 그것보다 빨리 훈련시킬 수 있고 주변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재료가 있었기에 조선시대에도 석전부대인 (척석대)가 편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중종때 삼포왜란이나 선조때 임진왜란 시기 전공을 세우게 되는데 그냥 막 던지는게 아니라 대오를 맞춰 엄호를 받으며 공격을 했을 것으로 판단한다. 이것이 수류탄으로 바..

역사이야기 2022.01.24

조선후기 지리 교과서

경매사이트에서 올라와 있던 조선후기 발간(개화기일 수 도 있지만) 된 '지구약론'이라는 책이다. 돈이 좀 있으면 사서 보고 싶은 내용이며 책의 상태도 좋다. 지구라는 말에서 땅이 둥근걸 알았고 언문 옆에 한자를 표기 했는데 지금은 쓰지 않는 아래 아 그리고 지구를 디구, 한자의 표기는 '가차' 라고 할 수 있는데 유럽(유롭)을 '구라파' 남아메리카(남아미리가)의 표기는 현재 쓰지 않는 '어두자음군(합용병서)'을 쓰며 한자표기는 소리와 유사하지만 언문이 더 정확히 표현을 하고 있다. 지구의 자전과 함께 밤과 낮이 바뀌는 원리를 설명했다. 해를 대하면 낮이고 해를 등지면 밤이다. 둘레가 75000리 표면은 흙이 1/3이고 물이 2/3라고 설명이 되어 있고 5대양6대주에 대하여 설명이 되어있다. 개화기 독립신..

역사이야기 2022.01.20

괴질로 불린 콜레라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모이는 것을 통제하고 영업을 규제하지만 해방이후 번진 콜레라는 엄청난 사망자와 혼란을 만들었다. 식량난까지 겹쳐 고통의 크기는 상상하기 어려웠으며 당시는 대한민국 정부가 아니라 미군에 의한 행정이 이루어졌고 경찰은 조병옥과 장택상이 수뇌부에 있었으나 다수는 일제때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국군이전 경비대가 있었고 경찰의 하부조직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북한체제에서 억압받고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 중 이남으로 내려와 입대한 이들도 있었지만 각 지역에서 일어난 시위와 폭동을 이들이 진압했고 그 과정은 참혹했다. 미군정은 이러한 사태를 해결하는데 나서긴 했지만 남쪽의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굶주림과 질병 그리고 사회불안은 갈등을 촉발시켰고 시위대와 경찰과의 싸움은 큰 희생을 불렀으며 폭력은..

역사이야기 2022.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