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나름 자본주의의 싹이 트려고 했고 이웃 일본은 막부정치를 이어 나갔으나 상인들의 힘이 강해진다.
우리의 경우 숙종 영조 정조등 탕평책을 실시하기도 하고 왕족들은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고자 숨기도 하고 노론이냐 소론이냐 아니면 남인이냐에 따라 권력을 잡으면 왕에게 상소를 하기도 하고 상대편의 단점을 지적 사사를 단행하고(사약을 먹여 죽임), 사대문 안에서 대규모 사형을 집행하기고 했으며 변방에 나가 있는 관리가 병권을 이용할 까 불러서 사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남쪽으로 유배를 간 사람을 다시 불러 북쪽의 삼수나 갑산으로 올리고 또 제주에 유배 간 이들을 다시 불러 관직을 수여하며 지금과 비교하면 말도 안되는게 차관급 공직자를 시골의 수령으로 보내거나 찰방 같은 자리에 내려보낸다.
정국이 바뀌면 다시 고위직을 하다가 어디선가 역모의 느낌이 있으면 관련자를 잡아다 심한 고문을 하고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어도 왕을 제외하고는 편안할 수 없었다.
당시 프랑스에선 대혁명이 일어나고 영국은 산업혁명이 있었고 미국은 독립혁명이 성공을 했다.
이런 혁명이 식민지 건설을 앞당기고 많은 나라의 국민들이나 원주민을 고통스럽게 한점은 있으나 왕조의 굳건함과 그 주변 친척과 외척의 안정을 넘어 이것이 백성을 괴롭히고 도탄에 빠지게 하며 군사력은 더 약해지고 기존의 유교이나 불교를 대신할 서학이 재야 지식인들에게 전파되고 학문을 넘어 종교로 서민들에게 뿌리를 내린다.
그 과정에서 죽음을 당하고 집안이 망하는 이들이 있었고 서학은 천주교로 더 확산되고 정착을 하는데 그 근본원인엔 '현실의 괴로움을 짧을 것이고 내세에 찾아올 구원과 영생은 길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고 본다.
무속신앙을 믿거나 절을 찾던 이들은 천주교로 개종을 하며 탄압을 피해 산간벽지로 숨어들고 이런 조직에 중심을 잡아줄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했지만 남유럽에서 오지 못했고 대신 청나라 신부 주문모가 대신 들어와 활동을 한다.
뒷날 조선후기 영정조 시대 멀리 보면 숙종 때 까지를 좋게 보기도 하지만 서로 죽이는 걸 반복했고 참혹했다.
세계가 변하고 있음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머릿속으로 바라봤던 당대 지식인들의 한계이기도 하고 대국이라는 청을 통해 제한적으로 바라봤던 당시의 한계이기도 했다고 본다.
그때에 비하여 자연과학과 함께 다양한 사상과 이념이 있음에도 크게 변하지 않은 건 내편이 아닌 상대를 대하는 극단적인 시각과 편견이라 생각한다.
내가 주도하면 천년만년을 하기 위해 상대방을 압살하고 그 상대는 칼을 갈며 복수를 결심하고 그러다 잡으면 피바람으로 끝을 보는 정국은 조선시대에 끝났어야 한다.
우리가 당한 식민지배와 남북분단 그리고 전쟁은 외세의 책임도 있겠지만 과거 지배층 사이에 꿈틀 거리는 편협함과 분열 그리고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산다는 생각 그 피바람을 보면서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이 저변에 자리하고 그것이 암묵적으로 용인된 탓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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