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있기전에도 조선은 왜의 침입이 있었다.
왜구라고 부르던 이들 중엔 불안한 일본 본토의 백성들도 있었고 대마도와 그 인근의 주민들이 약탈을 위해 조선의 남해안 특히 전라 좌도를 침입하고 척박한 제주도에도 온다.
이 왜구는 명나라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까지 나가 약탈,방화, 살인, 납치등을 저지르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행위가 진정된 건 일본 본토를 통일한 도요토미에 의해서다.
지금의 여수 순천 고흥 강진 완도 해남 완도 진도는 이들의 침입이 더 심했고 이곳의 섬과 해안의 피해를 막기 위해 군사가 동원 되어 싸우는 과정에서 왜구의 전투력을 파악하게 되고 특히 전라 좌수영은 정비를 하게 되고 어느 정도 대비를 했던 것 같다.
왜구라고 하니 소규모의 해적이라 판단할 수 있지만 당시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왜구들은 조총이 있었던 것 같고 기동력 뿐 아니라 포위 공격전술이 뛰어나 교전을 한 수군의 장수가 전사를 하기도 하고 그 당시 좌수사는 보직 해임이 되는데 그 이유는 예하의 장수가 원병을 요청함에도 묵과하여 죽게 되고 결국 그도 사형에 처해진다.
임진왜란이 있기전 발생한 정해왜변이 그것인데 당시 지금의 고흥(녹도)을 방어하던 이대원 장군( 만호)는 왜구의 침입을 초기에 분쇄하여 공을 세우나 두번째 침입은 중과부적으로 어렵게 싸우다 수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나 그의 공을 시기한 수사 심암이 병력을 보내지 않아 왜구의 손에 잡혀죽게 한다.
여수 삼산면 손죽도(손대도라고 부르기도 함)가 장군이 전사한 곳
당시 이대원장군은 22살이었고 일찍 부터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자리를 거쳐 지금으로 본다면 해군의 대령정도의 위치로 지역을 방어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왜구와 격전을 하여 크게 이겨 정부로 부터 수사로 임명이 되게 되었으나 당시 교지(임명장)이 도착도 하기전 전사를 하게되고 죽기전 자신의 옷을 말에 달아 자신의 부하에게 전달하니 그 옷은 장군의 고향(당시 양성현 지금의 평택 포승면)에 도착하여 몸대신 묻히니 정부에선 장군을 병조참판의 벼슬을 내린다.
그 후 시간이 흘러 녹도에는 정 운(전라도 영암출생: 지금은 해남군으로 편입된 옥천면)이 만호로 임명이 되어 이순신의 휘하에 들어가는데 왜란이 발발 경상좌수영 그리고 우수영이 배를 자침시키고 수군을 해체수준까지 갔을 때 도움을 요청했으나 전라좌수영 내부에서 의견이 분분했고 주저하는 분위기로 갔으나 이순신 보다 선배이고 나이가 많던 정 운 장군은 주저함이 없이 나가 싸우자고 하여 당시 벼락 출세를 했다고 하여 말이 많던 상관 이순신의 힘이 되고 지역을 떠나 영남, 호남을 구분치 않고 침략군의 몰아 내야 한다는 의지를 전달해 전선으로 나가 일본수군을 격파한다.
당시 일본군의 군수지원을 담당하는 부산포를 공격할 때 최선봉에 서서 나가 싸운 이가 정 운장군이며 육지에서 날아온 적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다.
정 운 장군은 충장공이란 시호가 내려지며 정 운 장군이 부산포에서 순국한 날이 부산시민의 날(10월 5일)로 정해진다.
이대원장군은 당시 청년이었으나 일찍 고급지휘관이 되었던 인물이며 정 운장군은 늦게 고급지휘관이 되었지만 두 장군은 같은 지역을 지켜냈던 군인으로 이순신장군은 이대원 장군을 모셨던 고흥 쌍충사에 정 운 장군을 모신다.
정해왜변의 비극은 조선수군 특히 전라도 해안의 방비를 다지게 했던 사건이며 이 후 대규모 병력을 밀고 오는 전쟁에서 이순신의 수군은 연전연승을 하며 여기엔 같은 지역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충성을 다했던 인물들이 있었기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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