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차를 타고 이동을 하지만 200년전엔 걷거나 말을 타거나 강으로 다니는 배를 이용해서 이동을 했다.
영남대로니 해서 서울서 동래 부산까지 육로를 이용하여 사신들이 이동하기도 했으나 지금의 도로에 비하면 오솔길 정도에 불가하고 과거나 공무를 수행하거나 아니면 장사를 하는 이를 제외한 사람들은 지역간 이동이 적었을 것이고 밤이면 산짐승이 출몰하는 곳도 많고 당시 힘든 납세나 부역을 피해 산에 숨어 사는 산적들 때문에 혼자서 길을 나서는 건 위험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다음으로 다리가 없는 강을 건너는데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시간이 걸렸을 터...
200년전이지만 당시 광주군 초부면 능내 (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에 본가가 있던 정약용선생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묘역이 있던 충주 가금의 하소마을을 자주 다녀갔던 것 같다.
약 300리 보통 사람이 빨리 간다고 해도 3~4일 걸리는 거리를 숙식을 하면서 간다는 건 지금 시각으로 보면 힘든 일이고 당시 도로 사정이나 교통망을 볼 때 쉬운 일은 아닌게 분명하다.
또한 부친 정재원이 진주목사로 근무하다 병을 얻어 고인이 되는데 당시 서울에 살던 정약용 형제들은 큰일이 있기전 출발을 하나 진주에 갔을 때 이미 부친은 숨을 거두었고 장례를 치룬 후 충주의 하담마을에 긴시간을 이동하여 모셨다고 한다.
오늘날이면 5시간 정도 걸릴 거리를 오래 걸려 이동을 했을 거라 보여지며 과거 물길을 이용할거나 아니면 강가의 길을 이용하여 걸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진주 남강을 따라 내려와 낙동강이 역류할 때 상류로 어느 정도 올라 상주와 문경을 지나 고개를 넘어 지금의 제천이 된 청풍고을을 지나 뱃길을 통해 탄금대 인근의 하담마을로 가서 장례를 치룬 후 고향인 능내로 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육로만 이용할 경우 3~4일 소요되지만 수로 특히 홍수가 발생하는 철에는 빠른 시간 하류로 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부친의 묘를 형제와 돌보며 정조의 명에 의해 수원 화성을 만드는 계획을 잡았다고 한다.
친영제도(시집살이)가 보편하된 조선후기에 관직에 진출하지 못했던 정약용 조부는 외척들이 있던 충주 풍산홍씨들이 있던 곳에 묘를 썼고 그 이후에도 정약용의 부친과 모친을 모시고 형도 이곳에 모신 것을 보면 당시의 풍습과 다른 형식을 따른 것 같고 경기 남인이었던 정약용은 노론의 견제를 받으며 여러 관직을 역임하지만 신유박해 때 귀양을 18년 하면서 고난을 겪는다.
보통 인근의 사람들과 통혼을 하고 평생 태어난 곳에서 살다가던 시대에 지역을 뛰어 넘고 외할머니가 살던 곳이나 어머니가 살던 곳을 왕래하며 다양한 경험을 하고 개방적이고 실천적인 학문을 연구하며 평생을 살지 않았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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