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304

개성인삼의 유명세

개성인삼은 지금도 유명한데 분단이 되었지만 파주일대에서 그 명칭을 사용하며 강화에서도 많이 기른다.오늘날 금산이나 풍기등 다른 지역의 인삼이 유명하긴 하지만 개성에 비하면 덜 하다.일제강점기 지도를 보면 개성의 주변은 대부분 인삼밭으로 되어 있는데 과장이 되었다고 봐도 그 면적은 상당하다. 지금의 장단 비무장 지대와 군사분계선 부근도 인삼의 재배지이다.지금은 간척이 되어 서해안이 단조롭게 변화하였지만 당시 해안선은 복잡하고 인천의 경우 월미도와 시가지는 떨어져 있고 수문식 독크가 있으며 지금은 찾을 수 없는 원도라는 섬이 있다.이 원도라는 섬은 현재 아파트 단지가 들어와 있고 과거 조선시대엔 국가에서 제사를 모시던 장소 였다고 하며 지금도 인천시민들은 행사를 한다고 한다.고양시의 벽제나 강화도엔 ..

역사이야기 2025.03.06

도시의 발달과 일본의 이민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에 이민을 온 일본인들은 1910년 17만명에서 1930년에는 50만명 그리고 1935년에는 60만명으로 증가하는데 당시 조선의 도시인구의 비율과 숫자는 지금과 비교했을 때 1/20도 안 되었다.서울이 44만명, 부산이 18만, 평양이 18만, 대구 10만 7천명 인천이 8만3천,목포 6만, 원산6만, 개성5만6천, 청진 5만 6천, 진남포 5만, 함흥 5만7천 ,신의주 5만 8천, 광주5만, 군산 4만2천, 나진 3만1천등 주요도시의 인구를 보면 서울을 빼면 지금의 중소도시 인구로 도시규모는 크지 않다.주목할 것은 신의주 옆의 의주는 1만명 정도이며 전통적으로 조선의 지방 중심이었던 공주나 청주 춘천, 진주, 해주의 인구를 보면 오늘날 읍인구 수준이며 이는 산업화와 도시화..

역사이야기 2025.03.05

화성 송산면의 3.1 만세운동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의 한건물 게시판을 보면 3.1만세운동에 대한 사건의 기술과 당시 투옥되었던 지역의 주민들의 사진과 신상이 기록되어 있다.알다시피 철도가 발달한 지역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시작이 되는데 특히 장이 서는 날 모여 시위를 했다. 일본의 군과 경찰에 의해 시위현장에서 다치거나 죽기도 하고 이후 시위에 가담한 이들은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구속이 되며 형무소에 수감이 된다.송산면의 경우 2000여명이 시위에 참가를 했다고 하는데 당시 인구를 봤을 때 적은 인원이 아니며 일본 경찰 노구치는 운동 가담자에게 총을 쏘아 부상을 입히며 이에 격분한 시위대는 인근 남양으로 도망가는 노구치를 죽이게 된다.관련자들은 무거운 형량을 선고 받게 되는데 만세운동은 인근으로 확대..

역사이야기 2025.03.03

일제 강점기의 언론 통제 2

일제는 언론을 통제하는데 있어 많은 압박을 했는데 삼천리니 3.1, 근화(무궁화)같은 제목을 삭제하였으며 40년 민족지라고 불리던 동아나 조선일보도 폐간을 하는데 이 민족지라는 신문들도 일본왕에게 아부를 해 보았지만 더 버틸 수 없었다.아무튼 총독부의 지시 중에 어제에 이어 내린 지침을 살피겠다.연호가.일한병합 후 기술한 문장에는 원칙적으로 황기, 또는 명치, 대정, 소화의 연호를 사용하고 서력 및 중국력은 보충적으로 사용할 것.나 단기, 불기, 공기, 포덕 등의 연호는 정치적 의미가 없는 것에 한하여 각 종교파벌에 따라 이를 사용함을 인정함.다. 서력은 정치 역사적 의미가 없는 것과 세계적 기사에 한하여 사용할 것 4. 총독퇴진에 관한 기사는 조선통치에 영향하는 바가 큰 만큼 함부로 이를 다루지 말..

역사이야기 2025.02.27

일제 강점기의 언론 통제1

과거 이승만독재나 유신독재 그리고 전두환 독재시기에도 그랬지만 1939년 총독부 경무국은 언론과 출판물에 관한 주의사항 "편집에 관한 희망 및 주의사항"을 지시했다.1.황실의 존엄을 모독할 염려가 있는 기사나 사진을 다루지 말 것.기사나 사진을 다룰 때에는 특히 정중히 다루어야 하며 문자에 오식이 없도록 주의 할 것2.왕공족에 관한 기사, '일한병합'후 기술한 문장에는 다음 점에 주의할 것가.조선역사 왕의 호에는 성상, 금상의 자구를 사용하지 말 것.단 태조, 순조, 철종 동비, 민비에 대한 추존은 무방하다.나.고종, 순종 동비에 대해서 황제, 황후를 사용치 말 것.다. 왕실기사에는 순종이후(일한병합이후)의 기사까지 이것을 기입할 것.3.조선통치정신에 배판(비판의 오기 아님)하는 기사(1)역사에 관해가...

역사이야기 2025.02.26

독립신문에 나온 안창호 선생 연설문

독립신문은 독립협회에서 발행하던 것이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고 다음으로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것도 알려져 있는데 매일 나오던 것은 아니고 수,목,토 발행을 했다.외국 땅에서 신문을 한글과 한문을 섞어 편집을 하고 출판을 했다는 사실이 놀라우며 여기에 들인 공은 엄청나다고 본다.이 신문에서 활약했던 이가 춘원 이광수였으며 그는 후에 180°방향을 바꿔 친일행위에 적극 가담한다.아무튼 당시 독립신문에는 안창호 선생이 민주주의에 대한 연설문이 기록되어 있으며 대략적인 내용은 인민(인민이란 말은 해방 후 유진오가 헌법을 기초할 때도 쓰던 용어) 주권에 대한 것을 알기 쉽게 설명하였으며 인민 개개인은 황제이며 내각을 구성하는 총리나 공무원은 노복이라 했다.노복을 부리는 데 있어 나라 마다 특징이 있음을 미국여성..

역사이야기 2025.02.21

지리부도에 나타난 일본 군국주의

일제강점기 지리책과 더불어 지리부도가 있었고 출판사는 삼성당이며 도쿄에서 만들어 졌다.이책의 주인은 한순덕 님으로 5학년이라 표시 되어 있다.당시 고등여학교나 사범학교를 다녔을 수 있고 해방 후 우리나라의 학교에서도 참고를 했을 수 있다.특이 한 건 입헌군주국 그리고 군국주의 국가 답게 겉표지 안쪽에는 일본왕의 깃발 부터 섭정기 , 황족기 등 지금도 일본에 가면 볼 수 있는 국화빵 문양이 그려져 있다.다음으로 일본군의 육군기 , 해군기 등 다 나오지 않지만 대표적인 깃발들이 그려져 있고 병과에 따른 연대나 대대기를 유추할 수 있도록 표시 해 놓았다.또한 주야간 경보신호 그리고 기상에 관한 깃발들도 있다.학생들이 군에 입대를 하여 따로 교육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세하다.또한 이 책을 사용한 분이 연필..

역사이야기 2025.02.14

백골단에 대한 ...

백골이란 이름은 듣는 느낌이 좋지 않다.강한 느낌도 있지만 공포심을 불러 일으키는 명칭이다.백골부대라는 보병3사단의 별칭도 있고 백골병단유격대라고 하여 6.25당시 38선 이북에서 활동을 하던 부대도 있었다.이들의 경우는 고향을 찾고자 온몸을 바쳤던 군인들과 전시 국가의 명령으로 비정규전을 하던 이들이 쓰던 명칭이다.여기까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총을 들었던 조직의 명칭에 '백골'이라는 이름을 써서 적에게 공포감을 주고 자신들의 의지를 높였다.그러나 이승만 정권 부산정치파동시기 자신의 집권을 위해 동원했던 깡패들 명칭 또한 백골단이라 하기도 했고 이후 80년대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핼멧을 쓴 사복경찰들이 등장하는 데 이들이 백골단의 대표 상징으로 악명이 높았다.일반 전의경의 소요진압과는 달..

역사이야기 2025.01.12

한화그룹 창업자 '고 김종희 회장'

뉴라이트계열의 학자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피해의식이 강하고 사기꾼들이 많다는 말을 하며 일본에 의해 근대화가 되고 지금의 한국이 되었다는 정신나간 소리를 한다.사기꾼이 많아진건 사회가 발전하며 도시화가 되고 범죄의 양상이 변하여 늘어난 부분도 있고 국가나 사회에 따라 사기라는 범죄의 범위가 다를 수 있다고 본다.분명한 건 일본이 우리나라에 식민지 정책을 하면서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이 되고 이 도시의 인구비율에서 1:5(일본: 조선) 1:3까지 간 것을 보면 많은 일본인들이 철도가 건설되고 항구가 만들어진 도시에 살았고 부산, 대구, 인천, 목포, 마산, 군산, 원산, 함흥, 청진 , 진남포, 신의주 등지에 공장과 은행 그리고 농장등을 만든다.문제는 산업이나 교육 문화시설..

역사이야기 2025.01.05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자료집

대한민국의 건국을 두고 3.1운동이후 만들어진 임시정부로 보느냐 아니면 미군정 이후 탄생한 정부를 시작으로 보느냐로 뉴라이트 학자들이나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임시정부를 폄하하고 일제의 지배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독립운동의 노력을 무시하며 미국에 의한 원폭 투하와 승리로 인해 해방이 되었다고 계속 주장을 한다. 다양한 독립운동 조직들이 모이기도 하고 갈라서기도 하고 그에 따라 각자 당을 만들기도 하고 합치기도 했으며 임시정부를 이어 나가는 데도 '여당'과 '야당' 이 있었다.기본적으로 정당을 통해 나라를 다스리는 ' 이당치국'이라는 원리가 있었고 독단적이지 않았다.1945년 일본이 패전하였지만 임시정부는 중국에 있었고 당시 정부에서 활동한 이들은 지금 보수라고 떠드는 자들과는 성격이 다른 이들로 ..

역사이야기 2024.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