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트계열의 학자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피해의식이 강하고 사기꾼들이 많다는 말을 하며 일본에 의해 근대화가 되고 지금의 한국이 되었다는 정신나간 소리를 한다.
사기꾼이 많아진건 사회가 발전하며 도시화가 되고 범죄의 양상이 변하여 늘어난 부분도 있고 국가나 사회에 따라 사기라는 범죄의 범위가 다를 수 있다고 본다.
분명한 건 일본이 우리나라에 식민지 정책을 하면서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이 되고 이 도시의 인구비율에서 1:5(일본: 조선) 1:3까지 간 것을 보면 많은 일본인들이 철도가 건설되고 항구가 만들어진 도시에 살았고 부산, 대구, 인천, 목포, 마산, 군산, 원산, 함흥, 청진 , 진남포, 신의주 등지에 공장과 은행 그리고 농장등을 만든다.
문제는 산업이나 교육 문화시설이 식민지 일본인과 본토 일본인을 위한 것이었지 조선의 많은 백성과는 무관한 것들이었다.
이후 군사적 거점엔 사단급 부대의 투입을 완료하고 고등경찰등을 더 많이 배치하여 준동하는 불령선인들(독립운동가)을 감시하고 투옥했으며 일제 식민지 시절 밥술을 뜨고 살던 사람들 중 일본에 협조한 사람들이 볼 땐 이해할 수 없는 집단이었고 해방이 되어서도 그 인식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고 본다.
산업기반을 만들어 주고 갔다고 하지만 공장이나 시설을 운영하던 주축은 일본인들 밖에 없었고 그들 마져 일본으로 가자 다시 기업을 하고 과거의 제품을 제조할 여력조차 없었다.
특히 중화학공업의 경우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을 해야 했다.
당시 옆에서 지켜보던 말단의 24살 관리자가 자본을 모으고 당시 국내에 있던 극소수의 기술자를 찾아 어렵게 섭외하여 다시 연구를 하고 개발을 하여 일본과의 국교가 정상화 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만을 통해 일본에서 원료를 들여오고 좋은 품질의 화약을 외국의 것 보다 싸게 제조하기 시작한다.
이는 산업화를 시작하는 우리나라에 큰 도움이 되며 기반이 된다.
다양한 인맥을 통해 여러 나라의 기업과 합작도 하고 투자도 이끌어 내어 기업을 키우고 일으킨 이가 있으니 바로 한화그룹의 창업자 '고 김종희회장'이다.
화약을 전쟁물자로만 보는 시각이 있는데 한국화약의 경우 건설에 필요한 것들을 국산화 하는데 초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었다고 한다.
비싼 외제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겠끔 하였고 수출을 하기도 했으며 70년대가 되기전 군에 필요한 화약을 만들어 자주국방의 토대를 만들었고 석유화학 산업과 에너지 산업 그리고 취약했던 기계공장을 인수 부품을 만들었는데 한화그룹이 해온 사업은 단기 수익이 나지 않는 것들이 많아 김종희회장은 다양한 투자자와 기업을 찾아 다녔고 정부를 설득하기도 했다.
중소기업이 해도 되는 소비재 제조 보다는 국가가 감당하거나 단기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운 기간산업을 일으키는데 신명을 다 바쳤다.
그러나 59세라는 나이로 일찍 별세하면서 사업은 아들 김승연회장에게 이어지고 항간에 불미스러운 폭력사건도 있었지만 기업을 운영하는데 있어 직원들을 믿고 또한 인수합병시에도 직원들을 보호하며 군에서 다치거나 피해를 본 이들을 채용하거나 도와주고 의리 하나 만큼은 한화그룹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다.
현재는 신재생에너지 부터 K 방산까지 우리나라의 기간산업을 지탱하는 기업이 되었다.
혹자는 문어발식 이니 독점이니 할 수 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일제 강점기가 지나고 혼란스러운 정국과 전쟁을 이겨내고 하나 둘 기반을 다져 만든 지금의 모습은 일본의 식민지 정책으로 인한 것이 아닌 불굴의 의지로 직원들과 밀고 당기며 피땀으로 노력을 해서 만들어낸 값진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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