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284

한강 인도교 폭파에 대한 것을 찾다가.

영화 건국전쟁의 상영은 그동안 잠시 잊고 있던 6.25와 이승만 정권에 대한 것을 다시 꺼내 보게 했고 자료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이사를 다닐 때 마다 무겁고 귀찮고 어떤 이들은 갖다 버리라고 했으나 버리기 아까운 것들이었다. 특히 한강 인도교 폭파에 대한 사실을 찾고자 인터넷이나 유튜브에 의존을 하지 않고 문헌이나 사진을 찾기 위해 온집을 뒤졌다. 심지어는 자칭 민족 우파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자료도 찾았다 . 아직 확인이 안된 것도 있으나 결론을 내릴 때 까지 구석구석 찾아 볼 것이고 혹시 내가 알고 있던 것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 생각을 해 보았다. 국방부와 육군본부, 유엔군 전사가 기본으로 상황을 이야기 하고 있고 그 당시 다리를 통과하거나 통과전 목격한 것을 적은 것이 있는데 공통적..

역사이야기 2024.03.12

조선이라는 이름을 쓰던 미군정

우리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 미군정을 실시했고 당시 대한민국의 명칭은 임시정부가 사용했고 그 산하의 광복군 또한 존재했으며 장교로 임관 시켰다. 그리고 대한민국 28년 이라고 써있다. 그렇다면 당시 미군정에 의해 만들어진 사관학교(지금의 육군사관학교)는 어떤 이름을 썼을까? 당시 임관하는 장교에게 수여된 영어와 국한문으로 된 졸업증서엔 조선 육상 경비대 사관학교라는 명칭을 썼다. 미군정이지만 '조선'이라는 이름을 썼다. 특히 단군기원을 쓴 것을 보면 이것이 망한 나라 조선이 아니고 그 옛날 '조선'을 의미 하는 것 같다. 자칫 북한이 쓰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나타내는 것 같지만 해방 이후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과정에서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을 놓고 갈등했었다. 국가 명칭을 놓고 정확한 의..

역사이야기 2024.03.11

교육과 문화 그리고 이승만 정권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중에는 교육을 활성화 시켜 문맹률을 낮추고 민주시민을 길러 냈다는 이야기를 한다. 일단은 맞는 부분도 있지만 그 기반을 만든 조직은 미군정과 당시 교육인사들이고 그러함에도 초등학교 교육을 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었고 지역유지들이나 학부모의 회비가 없이는 운영이 될 수 없었고 이 마저도 낼 수 없는 경우 학교를 갈 수 없었다. 정권 초기 초등교육비(초기 70%이상은 후원회비와 사친회비 였으며 완전히 사라진 건 1962년)의 비중은 높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지역 특히 군대가 주둔한 한강이북이나 후방이라도 군인들이 주둔한 지역의 주민들은 군에서 세운 공민학교의 도움을 받아 초등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어 군부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독립운동가로서 이승만이 외교론이다. 해서 나름 합리적이고 강대..

역사이야기 2024.03.10

이승만 정권 이후의 변화

6.25전쟁은 인구비례 군부의 비대화를 가지고 왔고 말은 자유민주주의를 한다고 했지만 일제가 하던 군국주의 보다 인구비례 더 큰 규모의 군대를 (일본군의 경우 대부분은 일본인이었지만)만들었으며 북한 못지 않은 청장년층 남성들이 원하지 않음에도 군인이 되었다. 이것이 좋은 점(청장년들의 교육과 사회화,)도 있었으나 사회에 부정적인 측면을 제시한 부분도 있었다. 전쟁을 치루며 정상적이고 긍정적이지 않은 한쪽으로 쏠린 우리나라의 경우 여당을 견제할 세력이 없었고 군부 또한 정상적이지 않은 집권당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이승만을 이은 박정희 정권은 군에서 전역하거나 퇴역한 인사들을 정치인으로 변신을 시켰고 다른 측면에서는 견제를 하기 위해 이들은 외교라인에 투입한다 외교의 다변화는 쉽지 않았고 속칭 자유..

역사이야기 2024.03.08

6.25와 이승만 독재

6.25 전쟁은 대한민국에 많은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이승만의 독재화를 공고히 하게 한다. 그 시작은 6월 27일 새벽에 입법, 행정, 사법의 인사에게 아무 통보도 없이 비밀리에 서울을 빠져 나간 것 부터이다. 이유는 그 당시 정상은 아니지만 3부 요인들이 서울에 있었고 정부가 작동을 하고 의정부에서 밀리고 있었지만 시민들의 피난 시간을 만들기 위해 많은 병력과 화력이 대응을 하고 있었고 그 무섭다는 전차에 맞서서 육탄으로 맞서고 대포의 직접조준사격으로 접근을 막고 있었고 미군의 항공폭격도 있었고 군 지휘부에 늦게 참여는 했지만 빨리 한강을 건널 수 있도록 소식을 전파했으면 한강교 이외에 철교(적지만 건널수 있는 길이 있고) 이천이나 충청도 쪽으로 가는 이들은 광진교나 아니면 경기 ..

역사이야기 2024.03.06

한강교 폭파, 유튜버의 주장만 듣지 말고

요즘 한강폭파에 대한 내용을 놓고 유튜브에선 논란이 많다. 이승만 대통령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한강 인도교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군경만 수십명이고 다리를 통제했기 때문에 군인들도 통행이 어려웠고 민간인은 다리에 들어올 수가 없기에 희생자는 500~800명 불가능하다고 이야기를 계속 이야기 하고 국방부의 해명 또한 소수 미국인의 증언을 토대로 한 국방부의 한국전쟁사이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다! 라고 이야기 하고 일부 많은 네티즌들은 시신이 500명 넘으면 유가족이 있어야 하고 엄청난 피해인데 왜 증거가 없냐? 며 국방부의 해명도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난 다리위에 있다 죽음을 당하고 추락하여 익사하고 화상으로 사망한 사람만을 보는 것이 아닌 당시 공병대가 설치한 폭약의 위력에 의한 사망자에 더 촛점..

역사이야기 2024.03.03

장군들도 크게 실망한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은 이박사로 불릴 만큼 개화기 부터 미국으로 건너가 교회의 도움을 받아 공부를 할 시기엔 능력이 있던 인사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혼란 6.25 사변을 겪으며 군통수권자로 보여준 행동은 실망 그 자체에 탄핵이 되어도 할 말이 없다. 인터넷을 찾아 알아내는 것도 좋겠지만 오래전 부터 집에 두고 보던 각종 자료와 책을 찾아 나의 뇌피셜이 아닌 당시 살았던 인물 들의 증언을 토대로 이승만 대통령의 문제를 지적하겠다. 자유민주주의 어쩌고 하는데 이 대통령이 행한 건 자유민주주의가 아니고 왕조국가의 왕이 하던 말도 안되는 명령이었고 그 아래 있던 행정부 고위직 공무원들도 힘들었겠지만 특히 장군으로 6.25동란을 겪고 나중에 초대합참의장과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특이한 경우)이형근 대장의 회고록 그리고..

역사이야기 2024.02.28

인터넷에 나오는 한강교 폭파 사진의 오류

어제는 한강다리 폭파에 대한 여러 생각을 하다 과거의 지도와 사진이 너무 부족하고 당시 기록이 빈약함을 느껴 50년대 한강다리 주변의 사진을 찾아 당시 폭파한 곳이 오늘날 노들섬 바로 아래 그리고 지금의 한강대교 아치가 없는 곳이 과거엔 한강소교라고 해서 폭이 좁은 교량으로 오늘날 노들섬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았다. 특히 위의 다리는 지금처럼 넓고 튼튼한 다리가 아니었고 그 아래는 모래와 습지라 사람들은 다리를 건너지 않아도 통행이 가능하며 당시에도 노들섬은 공원 비슷한 공간이 있었던 것 같다. 이곳에 피난갈 사람들이 있었을 수 있고 사람들을 위의 작은 다리에서 통행을 막을 수 있었겠지만 어두운 밤이라 강변과 모래톱을 통해 접근하는 민간인을 병력과 경찰은 통제가 어려웠을 것이다. 때문에 습지가 된 넓은 들..

역사이야기 2024.02.26

한강교 폭파가 만든 결과!

어제에 이어서 한강대교를 폭파하고 북쪽이 고립된 현실에서 서울에 남은 시민들은 엄청난 고통에 빠진다. 어떤 이들은 남으로 간 사람들도 있지만 거꾸로 북쪽의 산이 있는 양주나 지금의 양평부근 시골로 피난을 간다 다음으로 과거의 한강은 지금의 한강처럼 폭이 넓지 않았고 직강화되지 않았으며 수량도 풍부하지 않았다. 지금의 노들섬은 용산과 하나 였으며 고립된 곳이 아니었고 지금 노들섬 북쪽은 강북이었다. 다음으로 한강철교는 길지만 한강 인도교는 짧다 보니 강을 건너기 유리한 장소였고 이곳이 바라다 보이는 노량진의 높은 부분에 후퇴하던 병력들은 배치가 되어 한강 방어선을 설치한다. 넘어 오는 쪽도 쉽지 않았고 한강대교는 끊어 졌으니 왼쪽의 한강철교를 통해 군과 경찰들이 이동을 하였고 이것도 미군 폭격기에 의해 폭..

역사이야기 2024.02.25

미국 지역 언론사의 3.1운동 보도 (Sacramento Bee)

여름 미국으로 휴가를 갔을 때 캘리포니아의 주도인 새크라멘토(인구가 약 50만)역사 박물관을 방문한적이 있었다. 박물관 건물의 규모나 크기는 크지 않았지만 전시해 놓은 것들이 다양했고 실감나는 것이었다. 특히 예전의 인쇄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표지판엔 Sacramento Bee라는 글씨가 있었다. 당시엔 전시물들의 의미가 무언지 몰랐고 그냥 지역의 오래된 기업이라고 생각을 했으나 '새크라멘토 비'는 이 지역의 신문사로 역사가 100년이 휠씬 넘었으며 우리나라에 3.1운동이 일어난 시기 신문사 대표는 한국에 있었다고 있다.(왜 왔었는지 모르지만...) 당시 우리국민들의 평화적인 독립운동을 기사로 다루어 큰 의미를 두었고 일본의 폭압적인 정책을 비판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긴..

역사이야기 2024.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