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284

6.25전쟁의 다른 명칭

국제사회에서는 6.25전쟁을 한국전쟁(The Korean War)라고 칭한다. 일본에서는 '조선전쟁'이라고 칭하고 중국에서는 '조선내전'이라고 하기도 하고 자신들이 북한을 도와 미국에 대항했다고 하여 '항미원조전쟁'이라고 한다. 구소련 또한 중국과 마찬가지로 '조선내전'이라 한다. 그리고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는 '조국해방전쟁'이라고 하는데 1950년 8.15 미국의 힘에서 해방을 시킨다는 명분으로 6.25일 38선 일대에서 공격준비사격과 함께 밀고 내려온다. 통상 전쟁의 명칭을 쓸때 전쟁 당사국의 국명을 쓰는 경우가 있으며 예를 든다면 '베트남 전쟁'이나 '러일전쟁,청프전쟁' 같은 경우이다. 다음으로 전쟁의 목적이나 성격을 보고 사용하는 미국의 '독립전쟁' 유럽의 ' 종교전쟁' 등이 있다. 그리고 전쟁의..

역사이야기 2022.07.15

민족문화의 왜곡

일본어는 우리 생활에서 많이 쓴다. 영어도 일본식으로 발음하던 것을 많이들 써왔다. 미루꾸(milk), 구락부(group), 가라스(glass), 멤바(mumber), 남바(number) 미루꾸는 우유인데 어릴적 캬라멜을 밀꾸라고 했었다. 구락부는 나이트 클럽이나 어떤 사교단체를 이르는 말로 써왔고 유리창을 가라스 멤버를 어른들은 멤바 자동차 번호판을 자동차남바라고 했었다. 일본식 영어야 그렇다 쳐도 오꼬시(강정), 쓰르메(건조한 생선이나 오징어) 간쯔메(통조림)같은 단어는 시골로 전학을 같을 때 동창들이 쓰고 동네 어른들이 써서 알 수 있었다. 베트남도 프랑스 그리고 일본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상품을 팔기 위해 그런 건지 상자에 쓰르메라고 써있어서 내용물이 무언지 알 것 같다. 일본이 시행..

역사이야기 2022.07.02

정약용선생이 복원했다는 '자산어보'

예전의 책은 인쇄를 해서 많은 양을 남기기도 했지만 한자로 써져 있기에 글을 잘 쓰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필사(보고 베낌)를 해서 책으로 남겼다. 한글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처럼 규격화되고 단순화한 자모가 있었다면 책이 잘 팔렸다면 인쇄를 하고 원본의 가치를 높였겠지만 책의 내용 또한 전문성이 강하고 팔리기 어렵고 팔려도 문맹률이 높다보니 책이란 것이 공부를 하거나 취미 또는 재미로 보는 것이 아닌 벽지를 대신하거나 장판을 대신하는 아니면 불쏘시개 아니면 화장실용으로 사라졌다. 특히 내용의 해석을 두고 상대편이 지적을 하고 공격을 하면 논쟁이 생겨 큰 수난을 당하거나 귀양살이 내지 사형까지 이르기에 어떤 책들은 집안에서 자손들을 통해 전해질 뿐 세상에 나오지 않고 사라졌을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당대에도..

역사이야기 2022.06.29

세금부담과 사회불안

과거 군역을 대신해서 옷감을 징수하던 제도가 조선에 있었다. 정조 때는 농작물의 작황이 안좋아 면포의 생산이 줄어 왕은 군포의 징수를 2필에서 1필로 줄이고 재산이 많은 사람들에게 더 걷게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가던 부담은 없는 이에게 가게 되고 세도정치 기간에는 군포징수가 함부로 이루워 지는데 그 정도가 그전보다 심화된다. 이름하여 백골징포 (사망한 이에게 옷감을 징수), 황구첨정(어린이에게 징수), 강년채(고령의 노인에게 징수), 인징(이웃에게 징수), 족징(친척에게 징수)등 이 피해가 커지자 이런 부담을 피하고자 산속으로 도망가거나 무인도로 가기도 하며 국경을 넘기도 한다. 환곡의 폐단 또한 심했는데 국가는 힘든 백성들을 더 힘들게 했었다. 북한에서 한다는 인민5호담당제와 유사한 오가작통법을 만들..

역사이야기 2022.06.13

1920년의 정치사범 대폭 증가

1920년 동아일보를 보면 1911년과 비교하여 사건 사고를 분석하였는데 시위나 보안법 위반이 물경250배 증가했다고 한다. 그에 반해 강도사건은 1182건에서 400건으로 줄고 횡령은 339에서 1501건으로 증가, 살인은 263건에서 205건 간통과 중혼은 702건에서 555건이라 한다. 삼림령 위반이 8배 증가했다고 한다. 독립당의 손으로 살상도 다수라고 한다. 일본은 1910년 부터 1919년까지 헌병경찰제도를 통해 무단통치를 했으며 군인출신이 총독으로 임명되어있었다. 물론 뒤에 문화통치로 전환을 한다고 하지만 더 교묘해지고 독립운동 조직안에는 밀정들이 증가하는데 중국 땅에서 활동하는 조직안에도 쓰며든다. 1919 3.1운동(독립운동) 이후 소요와 시위가 증가 하여 경찰들의 업무가 늘어 문제라는 ..

역사이야기 2022.06.02

전염병과 정약용선생

코로나의 유행이 잠시 주춤하더니 원숭이 두창이라는 질병이 유행한다고 한다. 코로나의 시작이 중국이라고 하는데 워낙 넓은 땅과 많은 인구 풍토병이 있는 지역이다. 과거에도 우리나라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특히 압록강 하구의 의주부터 서울로 오는 길은 중국에서 번지는 전염병의 경로로 특히 이 길과 연결되어 있는 고을들의 주민들은 큰 피해를 봤고 지역을 책임진 수령들은 부담을 느끼기도 했고 피해의 당사자가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사신들이 중국을 오가면 편의를 제공해야 하고 특히 중국의 사신이 지나가면 접대(이 부담이 컷다고 전한다.)를 해야 하니 자칫 소흘하면 외교적 결례 정도가 아니라 사대의 예를 지키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곤혹을 치뤘을 것이다. 다음으로 중국에서 대규모 질병이 번져 사망자가 발생..

역사이야기 2022.05.30

일제 강점기의 광고

일제 강점기에도 개성인삼은 유명했던 것 같다. 고려송삼을 요즘말로 세일한다고 광고하고 있다. 개성 만월정에 주소를 두고 서울에도 진체(계좌)번호를 두고 장사를 하는 것 같다. 인삼 옆에는 만년필을 미국에서 수입하여 판매하는 가게의 광고가 있다. 만년필 상표가 '파인'인지 아니면 펜촉의 형태를 말하는 건지 견고하다고 선전하고 있다. 만년필이 18금은 (신사용) 8원80전 모양부무식(신사용)6원 80전이라고 되어 있고 최신안전잉크 지식은 14금짜리가 15원 순은으로 된 것이 7원50전이다. 무식이라고 말하는 만년필은 금이나 은의 도금이 아닌 것 같고 실무용은 4원 19전 학생용은 2원80전 정도한다. 당시 물가가 정확하지 않지만 1원이면 지금돈으로 만원정도가 아닐까 추측하며 순은으로 된 것이 지금으로 보면 ..

역사이야기 2022.05.28

무장독립운동 '육혈포 암살단'

일제강점기의 신문을 보면 시기마다 다르겠지만 1920년 8월 어느날 동아일보에 나온 기사의 내용이 눈에 들어온다. 해방 이후 당시 나온 신문을 축소복사한 것인데 인쇄된 글자체는 지금과 다르고 세로로 쓰며 이어쓰기를 하고 글의 호흡이 길며 마침표 같은 것이 잘 안 보인다. 당시 미국의 의원단이 경성(서울)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 총독과 고위공직자 친일인사가 모일 것을 예상하여 상해임시정부와 연결이 되고 국내외에서 준비를 한 젊은 인사들은 권총(모젤)과 탄약을 준비 육혈포 암살단을 조직하는데 대표는 '한 훈 30세이며 서울에 거주하지만 고향이 충남 청양이라고 나와있고 그외 서일순(본적 경성부 27세) , 이운기(본적 경성부 29세), 신화수 (본적 경남 고성 24세), 김화룡(본적 평북 영변 23세), ..

역사이야기 2022.05.21

영조와 정조시대를 좋게 보기도 하지만

조선 후기 나름 자본주의의 싹이 트려고 했고 이웃 일본은 막부정치를 이어 나갔으나 상인들의 힘이 강해진다. 우리의 경우 숙종 영조 정조등 탕평책을 실시하기도 하고 왕족들은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고자 숨기도 하고 노론이냐 소론이냐 아니면 남인이냐에 따라 권력을 잡으면 왕에게 상소를 하기도 하고 상대편의 단점을 지적 사사를 단행하고(사약을 먹여 죽임), 사대문 안에서 대규모 사형을 집행하기고 했으며 변방에 나가 있는 관리가 병권을 이용할 까 불러서 사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남쪽으로 유배를 간 사람을 다시 불러 북쪽의 삼수나 갑산으로 올리고 또 제주에 유배 간 이들을 다시 불러 관직을 수여하며 지금과 비교하면 말도 안되는게 차관급 공직자를 시골의 수령으로 보내거나 찰방 같은 자리에 내려보낸다. 정국이 바뀌..

역사이야기 2022.04.25

정약용 선생과 한강수로

지금은 차를 타고 이동을 하지만 200년전엔 걷거나 말을 타거나 강으로 다니는 배를 이용해서 이동을 했다. 영남대로니 해서 서울서 동래 부산까지 육로를 이용하여 사신들이 이동하기도 했으나 지금의 도로에 비하면 오솔길 정도에 불가하고 과거나 공무를 수행하거나 아니면 장사를 하는 이를 제외한 사람들은 지역간 이동이 적었을 것이고 밤이면 산짐승이 출몰하는 곳도 많고 당시 힘든 납세나 부역을 피해 산에 숨어 사는 산적들 때문에 혼자서 길을 나서는 건 위험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다음으로 다리가 없는 강을 건너는데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시간이 걸렸을 터... 200년전이지만 당시 광주군 초부면 능내 (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에 본가가 있던 정약용선생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묘역이 있던 충주 가..

역사이야기 2022.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