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의 책은 인쇄를 해서 많은 양을 남기기도 했지만 한자로 써져 있기에 글을 잘 쓰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필사(보고 베낌)를 해서 책으로 남겼다.
한글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처럼 규격화되고 단순화한 자모가 있었다면 책이 잘 팔렸다면 인쇄를 하고 원본의 가치를 높였겠지만 책의 내용 또한 전문성이 강하고 팔리기 어렵고 팔려도 문맹률이 높다보니 책이란 것이 공부를 하거나 취미 또는 재미로 보는 것이 아닌 벽지를 대신하거나 장판을 대신하는 아니면 불쏘시개 아니면 화장실용으로 사라졌다.
특히 내용의 해석을 두고 상대편이 지적을 하고 공격을 하면 논쟁이 생겨 큰 수난을 당하거나 귀양살이 내지 사형까지 이르기에 어떤 책들은 집안에서 자손들을 통해 전해질 뿐 세상에 나오지 않고 사라졌을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당대에도 유명했지만 지금도 유명한 석학인데 많은 책을 써서 남겼다. 많은 책이 강진으로 유배를 가서 쓴 책이며 다양한 분야를 연구해 저술했고 초의선사, 김정희 등과 교류했다.
그에겐 어릴적 부터 따른 친형 '손암 정약전' 이 있었다.
배다른 형 약현이 있었으나 나이차가 좀 있었고 같은 어머니 (해남윤씨)에게 나온 약종이 있었으나 천주교 박해로 사형을 당했고 남은 두형제 또한 이 박해로 동생은 강진 그리고 형은 강진보다 더 먼 흑산도로 귀양을 보내는데 정약전은 유학에 관한 저술도 했지만 섬지역에서 보고 들은 경험을 살려 '바다 생물'에 대한 책을 쓴다.
그것이 '자산어보' 또는 '현산어보'라고 불리는 생물관련 책이다.
생각을 적고 다른이의 이론을 모으기 보다는 실제 관찰을 하여 만들었으나 원본은 없다고 한다.
이 책이 그나마 필사본으로 남아 있는건 다행인데 이책이 그림까지 있었다면 더 대단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듣기론 그림이 있었을 수 있으나 따라 그리지 못하여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추측한다.
그리고 귀양을 갔던 섬의 민가에서 원본은 벽지에 도배가 되어 있는 상태로 있었다고 하고 또 소설에서는 충주의 묘소 근처 산지기의 집에서 벽지로 도배가 된 원본을 정약용과 그의 자손들이 발견하여 손수 필사하여 남겼다고 한다.
정치적인 이유로 형벌을 받고 수형생활을 하는데 상대편이 다시 살아 날까 반대하고 죽이고 이러다 보니 능력이 있어도 세상에 나오기 보다는 숨어서 조용히 세상의 상황을 지켜보고 운이 좋아 다시 벼슬을 하더라도 정권이 바뀌면 또 형벌을 받고 먼 객지로 가서 귀양살이를 하고 본가의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거나 영영 못보게 되기도 하고 때론 절손을 당하는 일을 당하여 후세에 양자를 잇게 하고 이것이 또다른 가정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긴 귀양살이가 사회와 단절되고 가족이 해체되는 비극으로 가는 과정에서 시대를 넘어선 역작이 나오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세상에 나오지 못한다면 그 또한 안타까운 일이라 본다.
형 정약전과 헤어진 후 필담으로 안부를 전하다가 결국 만나지 못하고 정약전이 만든 책을 복원하며 정신적으로 해후 했던 정약용 선생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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