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이야기 249

국군포병의 시작.12

당시 포병3대대는 다른 부대에 마찬가지로 포대장과 참모 몇은 서울로 교육을 갔었고 군수장교였던 김운한 중위가 작전장교를 겸하고 있었다고 한다. 포병의 편제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군수장교가 작전장교를 겸임했던 걸 보면서 당시 상황이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고 인사장교가 정보장교를 겸임했다는 것 또한 당시의 상황이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다. 교육을 가더라도 대대참모의 경우는 대리로 근무할 장교가 있어야 했다. 그 어려운 가운데 자리를 지킨 김운한 중위의 증언에 따르면 춘천전투에서 특히 포병의 승리는 하늘이 도운 전투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나의 작은 생각은 대대장 김 성소령이 지휘관으로서 전투력의 핵심인 포술을 평상시 연마하고 주도 면밀한 계획을 수행하여 가까운 사거리를 감당할 수 밖에 없는 대포지만 유효적..

군대이야기 2018.12.04

국군포병의 시작.11

1950년 6월 개전이 되기전 다른지역도 그렇지만 인제의 신남지구에서 49년 접전이 일어난다. 당시 1개대대의 북한군을 섬멸하는 데 당시 포병도 참여를 하는데 아마도 포병 중대급이 지원을 했던 것 같다. 당시는 지휘관이 사탄관측 사격요구 부터 사격명령을 관측소에서 주도했다고 한다. 그러나 6.26 이후 포대장은 후방인 전포대에 위치했고 관측장교가 사격요구를 했다고 한다. 중요한 건 당시의 화력지원은 보병연대를 포병이 지원하기 위한 협조나 연락체계는 거의 없었고 보병은 보병대로 포병은 포병대로 싸우다 전면의 소총부대가 돌파당하면 전면에 사격을 하다 최후엔 영거리 사격(시한신관에 눈금 0을 맞추고 바로 쏘면 바로 앞에서 폭발)을 하는 위험한 격전이었다. 특히 신남지구에서의 전투를 거울 삼아(박격포 공격에 취..

군대이야기 2018.12.04

국군포병의 시작.10

지금까지 국군 포병의 이야기를 흐르는 대로 했다가 앞으로 갔다가 했다. 사람들은 보통 일찍 창설한 부대에 근무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업적이 많고 오랜 경험이 있어 무시를 못하며 현실을 대처 하는 데 있어서도 적응력이 뛰어난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부대들의 경우 전통이 있거나 없거나 그 시작과 뿌리는 하나이고 무언가 씨앗이 되어 지금의 나무가 되었는데 앞서 말했듯이 1948년 10월 25일이 포병 창설일이며 그전 부터 장교들과 기간요원들은 각 연대나 기타부대에서 선발되 포병훈련소에서 훈련을 거쳐 포병병과를 부여 받았다. 하고 싶다고 의욕이 넘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남다른 각오가 필요했고 중간에 그만두고 떠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포병사령..

군대이야기 2018.12.04

국군포병의 시작.9

당시에 포의 규모나 위력을 논한다면 M3 105mm곡사포나 57mm대전차 포는 보병연대 예하에서 운용해야 적합한 화포지만 포병과 보병을 구분하는 기준은 장비의 위력보다도 운용을 위한 체계라 보는데 현재 트럭에 탑재한 105mm곡사포를 보병연대에서 운용하려면 가장 시급한 것이 포술체계의 단순화라 생각한다. 이는 지휘체계가 원할하고 서로의 이해 협조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보며 다양한 업무와 임무를 가진 보병장교들이나 부사관이 운용하는 것도 좋겠지만 다시 공부하고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갈 수 있는 경우도 있기에 보병부대에 통신대가 있듯 보병부대에도 포병의 체계를 공부한 중견의 포병장교가 배속되어 화력협조반에 편성되어 연대 화력을 책임져 준다면 지금의 체제보다 전투력의 증강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당시..

군대이야기 2018.12.04

국군포병의 시작.8

흔히 창설 시기를 놓고 포병 대대 마다 누가 제일 빠르냐 따지게 되는데 일단은 병력을 모아 영등포에 사령부를 만들어(48.10.25일) 미리 교육받은 장교들과 기간요원들에 의해 편성이 된다. 당시 6개 대대가 만들어 지는데 1,2,3,5,6 총 5개 대대가 만들어 지며 처음 38선에 투입한 건 대대 단위가 아니었고 앞서 말한 노대현 중위의 기사문리 포격사건이 있던 시기로 포대라는 말은 없었지만 이때가 처음이며 그리고 49.4월 남한산성에서 최초의 실탄사격이 이루워졌다. (시기로 보면 노재현 중위의 기사문리 포격사건이 약간 빠른데 2문을 동원 직사를 하고 차후 곡사를 함) 장은산 중령이 이 때의 사령관이었고 정권차원의 도움도 있었으나 신태영장군의 아들이며 포병의 경험이 많은 신응균대령이 오면서 '포병연대'..

군대이야기 2018.12.04

국군포병의 시작.7

포병의 시작은 1948년 10월 25일 이었고 그 당시 포병을 만든 사람들은 원래 연대에 소속된 병력과 육사를 졸업한 임관한 소위들 그리고 군사경력을 인정 받아 비교적 높은 계급을 부여 받고 중간에 들어온 경우가 있어 말썽이 생긴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중위로 근무하여 기반을 다지고 있는 있던 노재현은 소위를 단 대대장이 임명되어 오니 어떻게 이런 말도 안되는 군대가 있냐며 따지고 거부를 했는데 소위로 임관 했지만 동기들 보다 빨리 소령으로 승진 대대장이 되어 상급자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훗날 의정부 금오리 전투에서 산화한 김풍익 중령도 임관은 깃수는 늦지만 경력을 인정 받아 소령으로 빨리 진급한다. 이런 것이 어쩌면 계급과 임관깃수 나이등이 복잡하게 얽히고 출신군에 따른 영향력등이 다양하게 반영되..

군대이야기 2018.12.04

국군포병의 시작.6

동란이 일어나기 전날 육본의 장교클럽의 파티로 고급장교들이 현지에 없는 경우도 있었고 사단장도 보수교육을 받는 경우도 있었고 (백선엽 대령의 경우 시흥보병학교에서 )포병부대의 경우엔 특히 장교단과 기간요원들은 당시 새롭게 변화하는 포술교리를 교육받기 위해 용산의 포병학교에 있었다고 한다. 도둑이 들려면 개도 안 짓는 다고 바로 그 형국이 었고 상당수의 트럭과 장비는 부평의 조병창에 입고 되어 있었고 그나마 동란 초기 전차를 가격할 수 있던 57mm대전차 포탄을 서울로 입고 시켰다는 주장들이 있는 걸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고 미군의 고문관(우리군을 실질적으로 통제 관리한 장교들)들의 대책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았다. 아무튼 포병들이 쓰던 동란 전 사격지휘방법은 공산권국가의 군대나 북한군이 ..

군대이야기 2018.12.04

국군포병의 시작.5

서부 전선의 경우 후방에 있던 포병이 문산 쯤에 추진되었을 때 벌써 개성은 함락되었고 전방에 추진 되었던 연대예하의 병력들은 후퇴하고 있었다. 사단 포병대대 또한 많은 양의 포탄을 사격하며 대응했으나 중과부적으로 후퇴를 단행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포대장이었던 이용전 대위(야전포병대가의 작사가)는 공격을 수행하다 포를 빼서 후퇴하는 과정에서 도로가 비로 유실되 길이 막히게 되고 적의 공격을 받고 전사를 하며 포병학교에 재임할 땐 전포교관으로 이름을 떨쳤던 장교였고 별명은 표범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대대작전장교였던 노재린 대위(야전포병대가의 작곡가)는 후퇴하는 도중 봉일천 지구에서 백병전을 하다 전사하는데 포병학교에 근무할 때는 측지교관이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1사단 포병의 핵심 인력들이 아깝게 전사한 ..

군대이야기 2018.12.04

국군포병의 시작.4

전쟁이 발발한 시기 각 사단엔 한개의 포병대대가 지원을 했었다. 그 마저도 한강 이남에는 포병부대의 지원을 받는 부대나 사단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사단을 지원하려면 4개의 포병대대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군은 그러하지 못했고 단기간에 병력을 훈련시키기도 어렵고 미군은 절대로 신형무기나 중화기를 보급해주지 않았다. 이유는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 군에게 넘겨준 무기가 공산군에게 고스란히 넘어간 경우를 봐왔기에 미국은 지원에 소극적이었다. 서해의 옹진반도 지금은 북한이지만 당시엔 17연대가 마치 해병 6여단 처럼 주둔하고 있었고 여기에 포병1개 대대(7포병대대)가 함께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전쟁이 나기전 부터 북한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25일 대규모 공격이 있자 중과부적으로 17연대와 함께 후퇴를 하는데 지휘부의..

군대이야기 2018.12.04

국군포병의 시작.3

사변이 일어 나기전 북한군과의 교전 중 가장 먼저 야포의 사격이 있던 건 아마 기사문리 포격 사건이 아닐까 생각한다. 포병의 창설은 1948년 10월 25일 정부가 수립된 후 영등포의 한 공장에서 시작되었고 초대 사령관은 장은산 포병학교교장은 김계원으로 장은산의 경우는 만주군 출신이었고 김계원은 일본 학병 장교 출신으로 연희전문을 다니다 일본군이 되었던 사람으로 군경력에 있어서는 장은산이 길었다. 당시 포병훈련소에서 교육을 받은 장교중에 노재현 (훗날 국방장관 역임)중위가 포병중대장(당시는 포대장이라는 명칭도 없었음)이 되어 105mm 야포(M3)를 끌고 장은산중령과 함께 험한 강원도 길을 넘어 당시 강릉의 10연대를 지원하고자 출동하여 오늘날 3.8선 휴게소가 있는 기사문리에서 당시 3.8선을 침입하여..

군대이야기 2018.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