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이야기

국군포병의 시작.6

lkjfdc 2018. 12. 4. 16:45

 

 

 

 

 

동란이 일어나기 전날 육본의 장교클럽의 파티로 고급장교들이 현지에 없는 경우도 있었고 사단장도 보수교육을 받는 경우도 있었고 (백선엽 대령의 경우 시흥보병학교에서 )포병부대의 경우엔 특히 장교단과 기간요원들은 당시 새롭게 변화하는 포술교리를 교육받기 위해 용산의 포병학교에 있었다고 한다.

 

도둑이 들려면 개도 안 짓는 다고 바로 그 형국이 었고 상당수의 트럭과 장비는 부평의 조병창에 입고 되어 있었고 그나마 동란 초기 전차를 가격할 수 있던 57mm대전차 포탄을 서울로 입고 시켰다는 주장들이 있는 걸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고 미군의 고문관(우리군을 실질적으로 통제 관리한 장교들)들의 대책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았다.

 

아무튼 포병들이 쓰던 동란 전 사격지휘방법은 공산권국가의 군대나 북한군이 쓰는 방법으로 포대장이 관측소에 위치하여 포탄사격을 한 후 그것에 의해 포진지의 위치를 표정하여 잡고 방향과 거리를 계산하여 사격하던 방식인데 이를 SD사격이라 하며 초탄을 쏜 후 효력사 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고 관측소에 위치한 장교의 능력이 절대적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 사격기재는 현재처럼 미터척이 아닌 야드척에 의한 거리를 계산했고 사격도판의 부채처럼 생긴 선형척도 재료가 프라스틱이었다.

 

그러나 미군도 새로운 방법으로 사격지휘을 했는데 그 방법은 TAG(표적격자용지)를 이용한 사격법으로 국군이 이것을 받아들였는지 전혀 다른 방법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포대장이 관측소에 위치해 사격요구를 하고 유도를 하는 것이 아니고 관측장교의 역활이 강조된 것만은 분명하다.

 

결국은 격전을 치루면서 정확한 포탄 유도를 위해 무거운 무전기(보병부대에서 쓰던 가벼운 무전기가 아닌 통달거리는 길지만 무게가 쌀가마처럼 많이 나가는 무전기)를 가지고 접전지역으로 나가 많은 희생을 치루게 된다.

 

아무튼 부재중인 사필요원들이 빠진 전방의 포병부대는 있는 병력을 일단 수습하여 지휘요원을 구성한 후 초기 대량으로 떨어지는 북한군의 화력에 맞서 훈련받은 대로 격전을 벌인다.

 

이때 서울에 있던 포병교육생이나 파견병력들을 수습 서울 전면의 중서부 전선으로 투입하려 하였으나 특히 강릉에 있던 1포병대대(18포병대대로 동란 직후 명칭 변경)의 요원들은 대대장을 중심으로 모여 중서부 전선으로 간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근무하던 강릉으로 가기위해 서둘렀고 긴 시간을 이용 강릉에 갔을 때 상황은 상당히 악화되어 있었다.

 

이런 경우는 춘천의 3포병대대(16포병대대로 개칭 6사단을 지원했었기에)도 마찬가지 였고 이들도 춘천으로 갔는데 그래도 춘천은 기차가 다니던 시기라 강릉보다는 상황이 나았으나 접전이 벌어진건 같았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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