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 전선의 경우 후방에 있던 포병이 문산 쯤에 추진되었을 때 벌써 개성은 함락되었고 전방에 추진 되었던 연대예하의 병력들은 후퇴하고 있었다.
사단 포병대대 또한 많은 양의 포탄을 사격하며 대응했으나 중과부적으로 후퇴를 단행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포대장이었던 이용전 대위(야전포병대가의 작사가)는 공격을 수행하다 포를 빼서 후퇴하는 과정에서 도로가 비로 유실되 길이 막히게 되고 적의 공격을 받고 전사를 하며 포병학교에 재임할 땐 전포교관으로 이름을 떨쳤던 장교였고 별명은 표범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대대작전장교였던 노재린 대위(야전포병대가의 작곡가)는 후퇴하는 도중 봉일천 지구에서 백병전을 하다 전사하는데 포병학교에 근무할 때는 측지교관이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1사단 포병의 핵심 인력들이 아깝게 전사한 것이었다.
당시 상황을 수습한 노재현 소령은 한강을 건너 김포로 와 시흥지역에서 새로운 명령을 받고 수원 평택으로 향하던 중 기차에 서울에서 적재해온 많은 양을 싫고 김계원장군등과 가다가 호주군 소속의 공군기로 부터 폭격을 받는다.
당시 공지합동훈련이 안되어 있던 공군은 한강과 금강을 착각하고 열차에 맹폭을 가하여 그나마 남아있던 M3 105mm곡사포의 탄약은 소실되어 버리고 당시 기차에 타고 있던 병력들도 시망하는 일이 벌어진다.
결국 대전까지 여러가지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내려가고 보병 뿐 아니라 포병도 재편되고 이때 새로운 곡사포 M2인 105mm 곡사포 그리고 75mm산포가 국군 포병에게 지급이 된다.
증언에 따라서는 대구에서 포를 받았다는 설도 있지만 대전이 설득력이 있으며 당시 수도사단이 격전을 벌인 진천전투에서 M2 105mm곡사포가 등장하며 평택에서 소실된 포탄으로 M3는 더이상 쓰고 싶어도 못 쓰는 화포가 되었던 것 같다.
분명한 건 M3가 우리군에게만 주워진 것이 아니고 대만의 군대에도 주어진 것이 사진으로 목격된다.(이걸 운용하라고 준 건지 그냥 생색만 낸 건지 미국만 알 수 있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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