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이야기

국군포병의 시작.4

lkjfdc 2018. 12. 4. 16:34

 

 

 

전쟁이 발발한 시기 각 사단엔 한개의 포병대대가 지원을 했었다. 그 마저도 한강 이남에는 포병부대의 지원을 받는 부대나 사단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사단을 지원하려면 4개의 포병대대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군은 그러하지 못했고 단기간에 병력을 훈련시키기도 어렵고 미군은 절대로 신형무기나 중화기를 보급해주지 않았다. 이유는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 군에게 넘겨준 무기가 공산군에게 고스란히 넘어간 경우를 봐왔기에 미국은 지원에 소극적이었다.

 

서해의 옹진반도 지금은 북한이지만 당시엔 17연대가 마치 해병 6여단 처럼 주둔하고 있었고 여기에 포병1개 대대(7포병대대)가 함께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전쟁이 나기전 부터 북한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25일 대규모 공격이 있자 중과부적으로 17연대와 함께 후퇴를 하는데 지휘부의 주요인력은 외부 교육중 이었다고 하며 대포는 바다에 버리고 몇몇은 특공대를 만들어 격전을 벌이지만 배를 타고 인천으로 탈출한다.

 

 

다음으로 1사단에 배치되었던 6포병대대는 동란 전 송악산 전투등에 참여하며 실전을 익혔으나 광면적에 배치된 상황에서 보병부대는 연대단위로 순환이 되었으나 포병부대는 상시 대기하는 상황이 오래되고 피로가 누적되었다고 판단한 노재현 소령은 병력을 후방으로 빼서 정비를 하고 있다가 일격을 받게 된다.

 

만약 연대규모의 포병이 사단을 지원을 하거나 서부전선과 중부전선 순환을 하거나 굳이 순환하지 않고 38선에 배치되어 있었다면 50년도의 상황이 어떠했을까 상상을 하지만 아마 시간만 늦쳤을 뿐 당시 서울을 뺏길 수 밖에 없는 상황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유는 북한의 경우 숙련되지는 않았지만 공군의 협조와 함께 다양한 화력체계가 상하급제대에 갖춰져 있었고 남한사회 보다 정치적 사회적인 요소에 있어 안정감이 있었고 소련과 중국의 계속적인 지원이 있어왔기 때문이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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