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서북청년단이 초기 포병의 주력이 되느냐?는 당시의 일어난 4.3사건과 여순사건 등으로 숙군작업이 일어났고 군내부에서는 사상검증이 뜨거운 사안이 되었고 특히 포병은 일정 정도의 학교교육을 받은 병력이 필요했는데 서북청년단의 청년들은 남한의 청년들 보다 학교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고 당시 지휘부가 짧은 기간 교육을 하여 실사격을 하고 전방에 배치할 수 있는 있었으며 같은 동향이었기에 지휘하는 데 있어 가장 적합한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서북청년단과 그 가족들은 당시 새로운 남한 사회에 정착하기 위한 생계수단이 필요했던 것이 결정적 이유라고 생각한다.
경제적 측면의 해결이 당시 사회의 급선무 였고 이념 이런 것 보다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큰 관건이며 지금도 이것의 해결 없이 나라를 이끌기 어렵고 종교든 정치든 교육이든 이걸 초월한 사람들은 대단한 인격자이며 여기에서 모든 문제가 생긴다고 본다.
아무튼 그 후 부대를 만들어 편성을 하는데 문제는 그들을 지휘하는 지휘부 특히 장교들 중엔 이북 출신도 있었지만 이남 출신도 있었기에 또 다른 갈등이 있었다.
중요한 건 이들이 뭉쳐 미군으로 부터 곡사포 (M3 105mm)를 수령(원래 기간요원의 교육은 당시 신형인 M2로 받았다고 함)하여 예하의 포병대대를 구성하는데 당시에는 보편적인 포병편성에서 보기 드물게 5문의 화포를 1개 중대(포대)로 구성했다.
근본적인 이유는 당시 91문의 화포를 받았으나 부족하여 15문씩 1개 대대 총 6개 대대를 만들고 1문은 교육용으로 썼다고 하며 이들 부대가 전쟁 직전 3.8선 부근에 배치되어 격전을 치루게 된다.
초기 포병사령관은 장은산 중령으로 만주군 출신이었고 당시 참모총장 정일권도 만주군 출신이었다.
그러나 일본군 포병 소좌 출신이었던 신응균이 해방후 군에 입대하지 않고 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다 이등병으로 입대하고 그의 아버지가 신태영장군(구한국 사관학교 출신이지만 일본육사를 나왔고 일본군 대좌출신)이 참모총장이 되면서 신응균은 대령으로 승진하여 포병사령관이 되는데 당시 장은산은 미국의 포병학교로 유학을 간다.(장은산의 부관이 김 구 선생을 살해한 안두희였다.)
한마디로 포병의 지휘부 핵심이 만군이었던 이북 출신 장은산 대신 일본군 출신이며 전직 계급이 소좌에다 실전 경험이 많은 서울 출신의 신응균으로 바뀌는데 당시 김 구선생 암살 사건과 정일권의 퇴임 그리고 미국으로의 유학은 포병의 분위기를 변화시켰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훗날 전쟁이 발발하고 경상도 지역에서 모병을 하면서 지휘부를 형성하는 장교단의 숫자에서 경상도 인맥이 이북 출신들을 숫적으로 압도하고 실무를 담당하는 병력들도 경상도 지역의 학도병과 청년들이 투입되면서 그 비중이 바뀌고 다시 진지전이 고착화 되면서 이번에는 서울과 충청 호남 출신 학생들이 입대를 하면서 군의 지휘관과 지휘자들의 구성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북출신의 비교적 높은 계급의 장군들과 이남 출신의 장교들과 소수의 장군들간의 역학 구도가 훗날 5.16의 원인 중 하나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한마디로 군이 특정 지역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는 건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중요한 건 동란이 발발할 당시 육군의 지휘부가 바뀐 것도 있었지만 포병의 주요 장교들은 미국과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으며 국내에 있던 강릉 8사단의 18 포병대대의 경우 대대장과 중대장이 서울에 출장을 나와 있던 예를 보면 그리고 서부 평야지대의 전방부대를 책임진 1사단장이 (백선엽 대령)이 보수교육을 받고 있었고 사단의 포병이 비교적 후방인 수색으로 빠져 정비를 하고 있던 당시 북한의 갑작스런 공격은 큰 충격이었고 국군은 초기 전투에서 치명적 타격을 입는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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