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이야기

국군포병의 시작.1

lkjfdc 2018. 12. 4. 16:20

 

 

지금의 지상군 전력에서 포병전력이 차지하는 부분은 높아졌다.

 

그 원인은 북한의 위력적인 지상화력에 대응하기 위한 대책 때문이다.

 

그 시작은 동란전으로 거슬러 올라 가는데 당시 북한군의 경우 미 육군(생각보다 미군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병력들을 제대 시킨다.) 보다 훈련이 잘 되어 있었고 다만 사단 화력을 증원하고 보충할 군단포병이나 기타 중 폭격기 같은 것이 빈약했다.

 

또한 이러한 군사력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많은 돈과 시간이 있어야 조성이 되는 것이라 본다.

 

한국군의 경우 동란시기 상대적으로 약했던 북한과의 지상군 화력 대결에서 차이를 보인 것도 있고 북한은 북한 나름으로 미국이라는 나라가 국군의 빈약한 화력을 증원해 줬던 악몽? 을 잊기 위해 구소련의 화력체계를 본 따 양적으로는 막강한 포병화력을 배치하게 되었고 이것이 남이나 북이나 화력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막대한 탄약값)으로 북은 그래서 핵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다.

 

아무튼 초기 해방된 나라는 대한민국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았고 군대는 경찰의 예비대로 국군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고 국방경비대로서 무기체계는 빈약했고 포병병과는 존재하지 않았다. (뭐 다른 병과도 없었고 가장 공격적인 기갑은 동란 시기에 생겼다.)

 

그러다 총선거에 의한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군이 되고 포병병과가 생겼으며 다른 병과도 그렇겠지만 분과별 화합과 포술전반의 이해가 없는 경우에는 포병자체가 만들어 지기 어려웠다.

 

당시 육군에는 대구6연대 1훈련소에서 중화기 교육(기관 총과 박격포, 대전차 포등을 교육)을 서울의 미군 7사단에서는 2훈련소(장은산이 주도)와 진해의 미6사단에서는 3훈련소(김계원이 주도)가 만들어져 야전 포병병과의 훈련이 시작되었는데 이들이 육군 포병의 기반이 되었다.

 

이 훈련으로 지휘를 담당하는 포병장교들과 기간요원들이 어느 정도 구성(주로 이북 출신들이 주도권을 쥠) 은 되었으나 장차 육군의 화력을 책임진 전력을 감당하기엔 부족했다.

 

일단 연대규모 병력의 포병단 병력을 만들기 위해 당시 모병을 했지만 쉽지가 않았고 특히 시스템을 이해하고 포술을 이해할 수 있는 병력을 구한다는 건 당시 농업인구가 대부분인 남한사회에서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북한에서 월남한 서북청년단의 회원들을 포병에서 약 1800여명 받아들여 입대시키고 포병사령부를 영등포에 만들게 된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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