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병의 시작은 1948년 10월 25일 이었고 그 당시 포병을 만든 사람들은 원래 연대에 소속된 병력과 육사를 졸업한 임관한 소위들 그리고 군사경력을 인정 받아 비교적 높은 계급을 부여 받고 중간에 들어온 경우가 있어 말썽이 생긴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중위로 근무하여 기반을 다지고 있는 있던 노재현은 소위를 단 대대장이 임명되어 오니 어떻게 이런 말도 안되는 군대가 있냐며 따지고 거부를 했는데 소위로 임관 했지만 동기들 보다 빨리 소령으로 승진 대대장이 되어 상급자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훗날 의정부 금오리 전투에서 산화한 김풍익 중령도 임관은 깃수는 늦지만 경력을 인정 받아 소령으로 빨리 진급한다.
이런 것이 어쩌면 계급과 임관깃수 나이등이 복잡하게 얽히고 출신군에 따른 영향력등이 다양하게 반영되어 군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일례로 만주군관학교를 늦은 나이에 입교한 박정희는 군관학교시절 당시 만군 대위인 정일권의 은혜를 입었었지만 동갑내기이다 보니 대통령이 된 박정희에게 생일이 느리다는 이유로 박정희를 형으로 하려 했지만 박정희는 사석에서는 정형이라고 했었다.
백선엽는 정일권의 만군 후배이며 나이가 어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일권을 형님!이라고 했고 이한림도 마찬가지 였지만 박정희와 동기다 보니 서로 반말을 했었다.
그러나 일본육사에 편입한 박정희는 나이어린 선배인 신응균(박정희가 만주에서 일본군 중위일 때 신응균은 오키나와에서 소좌였고 대대장이었다. 군경력에서 신응균과의 차이가 있다.)에겐 깍듯했다는 걸 보면 계급을 중요시하는 군대지만 인맥과 사람의 성격에 따라 대하는 것이 달랐던 것 같다.
또한 이용문과는 계급차이도 크지만 깃수차가 있고 나이는 이용문이 한살 많고 비행기 사고로 순직한 이용문의 아들 이건개를 돌봐준다.(이용문 또한 경력(일본군 소좌 출신으로 인정받아 육사 특별기수로 진급을 하여 초대 기갑연대장이 된다.)
또한 박정희의 경우는 해방전 군경력과 실력으로도 군사영어학교 출신 평균 이상의 대우를 받았을 수 있었고 장군도 빨리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육사2기라는 깃수빨? 에서 밀림과 함께 남노당 관련 군을 떠났던 시기도 있어서 인지 진급이 한참 늦었고 동기지만 '호형호제'하던 김재규 또한 중간에 군을 그만두다 복직한 결과 그는 진급이 박정희 보다 더 늦었고 여러가지 복합적 요소가 국군의 분위기를 좌우했고 박정희가 훗날 5.16을 일으킬 당시의 상황과 대통령이 될 당시 상황 그리고 대통령이 된 이후 군의 선후배 장성들이 그를 대한 자세는 그때 그때 다 다르지 않았나 생각한다.
아무튼 우리군의 특성상 연배나 학맥 인맥 지역에 따른 호형호제 혹은 연대감 이런 것이 영향을 주어 좋은 점도 있었지만 감정이 개입되어 사람을 평가하고 비판하는데 있어 객관적인 부분을 놓치지 않았나 생각하며 포병의 출발에 있어서도 특히 장교단 사이의 관계에선 계급보다 나이 혹은 군경력이라는 것에 의해 문제를 만들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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