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개전이 되기전 다른지역도 그렇지만 인제의 신남지구에서 49년 접전이 일어난다.
당시 1개대대의 북한군을 섬멸하는 데 당시 포병도 참여를 하는데 아마도 포병 중대급이 지원을 했던 것 같다.
당시는 지휘관이 사탄관측 사격요구 부터 사격명령을 관측소에서 주도했다고 한다.
그러나 6.26 이후 포대장은 후방인 전포대에 위치했고 관측장교가 사격요구를 했다고 한다.
중요한 건 당시의 화력지원은 보병연대를 포병이 지원하기 위한 협조나 연락체계는 거의 없었고 보병은 보병대로 포병은 포병대로 싸우다 전면의 소총부대가 돌파당하면 전면에 사격을 하다 최후엔 영거리 사격(시한신관에 눈금 0을 맞추고 바로 쏘면 바로 앞에서 폭발)을 하는 위험한 격전이었다.
특히 신남지구에서의 전투를 거울 삼아(박격포 공격에 취약) 춘천에 주둔한 포병3대대는 보병부대의 진지와는 다른 특유의 포상을 만들어 국지전에 대비하고 진지작업을 강화하는데 춘천교도소 재소자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진지를 만드는 데 있어 콘크리트로 보병진지를 만들었는데 포병진지의 경우는 나무와 가마니를 이용하여 대책을 세웠던 것 같다.
7사단의 사단장을 초기에 담당하고 군단장을 담당하며 지휘관으로서 책무를 담당하지 못한 유재흥 장군이 김종오 대령의 바로전의 전임 사단장이라는 건 좀 의외지만 나름 6사단장으로서의 역할을 전쟁 직전 수행했던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 상황이 벌어지자 무지막지한 화력에 공격을 받은 소양강 북방의 보병부대가 철수를 했지만 3포병대대 예하의 3개 포대는 국지전에 대비해 싸우던 연습 그대로 인민군 부대를 강타했고 강북쪽에 남아 있던 포탄도 신속히 시민들과 학생들이 날라 강 남쪽으로 운반하고 진지를 이동하여 춘천역에서도 사격을 한다.
당시 포병3대대는 다른 부대에 마찬가지로 포대장과 참모 몇은 서울로 교육을 갔었고 군수장교였던 김운한 중위가 작전장교를 겸하고 있었다고 한다.
포병의 편제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군수장교가 작전장교를 겸임했던 걸 보면서 당시 상황이 참으로 열악하다는 느낌이 들고 인사장교가 정보장교를 겸임했다는 것 또한 당시의 상황이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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