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3 포병대대(16포병으로 개칭)가 동란 초기 활약을 하여 강력한 침략군을 격퇴했다면 영동지방의 침략군을 격퇴한 포병은 1포병대대(18포병으로 개칭)였다.
이 부대는 대대장 부터 서울로 출장을 나가서 부대에 없었으나 사단사령부가 가까운 지역에 같이 있었기에 협조가 가능했던 것이 다른 지역의 포병에 비해 작전의 효율성을 높였던 것 같다.
또한 타지역에 비해 전선의 길이가 짧은 것도 유리한 점이 었다.
일례로 6사단의 경우 사단 사령부는 원주였고 7연대와 3포병대대는 먼거리인 춘천에 있었다.
지금이야 춘천과 원주 사이에 고속도로도 있고 교통이 편리하지만 과거엔 상당히 불편했고 원주에서 춘천을 가려면 기차를 타고 서울 청량리를 거쳐 가는 것이 더 편리했던 시기였다.
그에 비하면 강릉의 사령부와 인근의 1포병대대는 1948년 이후 포병이 만들어 질 때 부터 8사단과의 협조가 잘 되었었고 8사단의 화력지원 부대로서 튼튼한 동반자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서울의 육군본부와 너무 멀었고 개전 초기에는 동해안 전면뿐이 아니라 사단의 후방인 삼척으로 북한군이 상륙했다.
이는 진퇴양난의 고난이었고 결국 대관령을 넘어 서쪽으로 후퇴를 하는데 당시 후퇴를 하기전 까지 포병1대대는 강릉 전면에서 밀려오는 적을 향해 맹폭을 가하고 일찍 무너져 버린 보병부대를 대신하여 백병전을 치루기도 하고 통신선을 넘겨줄 수 없다고 적진으로 갔다가 전사한 병력들도 있었다.
중요한 건 서울에서 교육을 받던 1 포병대대 대대장과 장교들은 강릉으로 달려가 위기에 처한 자신의 부대에 합류하여 부하들과 함께 한다.
그리고 1포병대대는 쓰러지지 않는 오뚜기 8사단의 강펀치 역할을 하여 초기 동해안으로 침투하는 북한군에게 커다란 출혈을 강요하고 대관령을 통해 영서지방으로 철수했고 제천을 거쳐 단양 그리고 죽령을 넘는 장거리 이동을 하며 비교적 질서있는 철수를 했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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