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전 초기 북한군의 접근로 중 가장 화력과 기동력 병력들이 물밀듯 들어온 곳이 1사단 지역인 개성지역 그리고 7사단 지역인 동두천 포천지역이었다.
개성지역의 경우 강폭이 넓고 다리를 통한 접근이 시간을 지연시키는 측면이 있었으나 동두천 포천의 경우 자연 장애물이 적은 편이 었고 철도를 따라 또는 도로를 따라 북한군의 전차전력이 가장 강력하게 밀려온 지역이었고 초기 전선을 지키던 병력들은 순식간에 희생되었고 여러부대에 분산되어 있던 포병5대대(17포병으로 개칭)는 화력지원 임무를 제대로 실행 못하였다.
7사단으로 동두천을 대전에 있던 2사단을 급히 전진 배치하여 동두천 우측의 포천 방면에 배치하기 시작하지만 북한군의 강력한 공격에 속수무책이었고 어느 나라 전사에도 찾아 볼 수 없는 터무니 없는 병력배치가 이루워 지는데 다름 아닌 육사생도들의 포천지구 전투배치였다.
서쪽 김포반도에는 시흥의 보병학교 병력들(생도 포함)을 배치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질렀다.
다행스럽게도 김포의 경우 전면에 큰 강이 있어 포천이나 동두천에 비해 북한군의 전력이 덜 집중되어 다행이었다.
당시 수도경비사령부의 병력들도 중부전선으로 배치되었으며 화력지원을 위해 용산에 있던 포병학교 교도대(2포병대대: 김풍익 소령 50포병으로 개칭)가 의정부 동두천 포천에서 서울로 집중하는 길목에 포병을 배치하고 북한군이 서울로 집중하는 것을 지연시키려고 했다.
당시 포병최고의 지휘부인 포병연대의 지휘관과 장교들 육본의 고위장교들도 중부전선에 나가서 어떻게 해서든 서울로 못들어 오게 하기 위한 전술을 생각하고 실천에 옮겼지만 북한인민군의 전진을 막을 수 없었다.
전방에 있던 7사단과 갑작스럽게 작전지역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올라온 대전의 2사단은 뒤죽박죽 엉켜 있었고 거기에 배치된 포병대대는 길목을 지키며 적의 대규모 병력을 기다렸다.
57mm대전차포는 대전차탄 보다는 인마살상용인 고폭탄을 장전하여 전차를 공격했으나 큰 효과가 없었고 수일이 흘러 일본에서 온 24사단 포병들도 최후의 결전에만 쓸 수 있는 105mm대전차고폭탄을 소량가져와 전차에 대응사격을 오산전투에서 했었다.
당시 들리는 증언에 의하면 화력으로 전차를 막지 못했다면 다리나 교통로를 망가트려 적의 공격을 둔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음에도 작전을 담당했던 공병대의 대대장이 6.25일 서울에서 결혼식을 하기로 했고 관련 병력들은 대대장 결혼식의 하객이 되어 사변당일 서울시내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마디로 그냥 발생한 사건이 아니었고 군내부와 정치권에 북한의 계획에 발을 맞추어 손을 쓴 작자들이 있었을 것으로 확신한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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