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이야기

국군포병의 시작. 종편

lkjfdc 2018. 12. 4. 17:26

 

 

 

 

 

 

의정부 전선에 투입된 포병 2대대는 3개 중대로 분산되어 있었고 그 중 2중대의 6번포를 끌어내서 축석령의 길에 배치하고 전차를 기다린다.

 

당시 포의 사수는 김풍익소령이 하고 방향포경과 포신을 전차의 출현방향으로 향한 후 기다리며 방아끈을 잡아 당기는 부사수는 포중대장 장세풍대위가 담당한다.(당시 대전차 포탄을 썼다고 전한다.)

 

전포대장 최진식 중위는 축석령 후방에서 남는 포를 방열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다.

 

길위에 나타난 전차를 발견한 2 포병대대 2 중대의 6번포는 한점의 망설임도 없이 전차의 궤도에 일격을 가한다. 선두의 전차는 정지 시켰으나 갑작스럽게 방열을 하느라고 위장이 안된 대포는 바로 발견되어 전차포의 사격을 받고 전원 전사한다.

 

북한군의 전차는 앞 전차의 충격으로 의정부 진출이 지연되고 서울로의 진출도 지연되게 된다.

 

 

금오리에 있던 2중대의 최진식 중위는 대대장과 중대장 그리고 6번포 반원의 전사소식을 듣고 남아 있는 포를 가동하여 사격을 한다.

 

당시 희생된 고 김풍익 소령과 장세풍대위 그리고 포반원들의 유해는 지나가는 청년에 의해 가매장이 되나 그후 주변지역에 진지공사가 이루워 지면서 찾지 못했다고 한다.

 

 

지휘관이 책임을 지고 적전차와 침략군을 막기위해 몸을 던진 경우는 많았지만 김풍익소령과 휘하 장병의 희생은 상하가 혼연일체되어 하나가 된 군대의 모습이라 보며 이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군대가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국군 포병의 창설과정을 보면서 분단의 싱징을 보는 것 같아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한국군의 포병을 만든 사람들은 만주군과 일본군 ...

 

숫자가 미미한 광복군은 없었고 북한군 창설에 참여 했다가 동란전 국군의 포병에 참여한 장교가 있었다.

 

특히 포병사령관이었던 장은산 중령은 만주군장교였고 차후 포병연대로 바뀌며 포병의 최상급자 신응균은 일본군 소좌 부사령관이나 부연대장 혹은 포병학교 교장은 김계원으로 일본군 학병장교 출신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고 김풍익 중령도 일본군 병으로 징집되었다가 장교로 복무한 일본군 포병 출신이었다.

 

그리고 창설요원의 핵심과 기간요원은 평안도 출신이며 서북청년단에서 신분을 바꾼 청년들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당시 상황을 짧은 인생을 산 내가 이해할 수 있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식민지와 해방 이후 격동기 일그러진 환경에서 만들어진 대한민국 육군 포병이 시대의 아픔을 넘어 진정한 자주국방을 이루는 데 있어서의 선두 주자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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