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포병3대대는 다른 부대에 마찬가지로 포대장과 참모 몇은 서울로 교육을 갔었고 군수장교였던 김운한 중위가 작전장교를 겸하고 있었다고 한다.
포병의 편제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군수장교가 작전장교를 겸임했던 걸 보면서 당시 상황이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고 인사장교가 정보장교를 겸임했다는 것 또한 당시의 상황이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다.
교육을 가더라도 대대참모의 경우는 대리로 근무할 장교가 있어야 했다.
그 어려운 가운데 자리를 지킨 김운한 중위의 증언에 따르면 춘천전투에서 특히 포병의 승리는 하늘이 도운 전투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나의 작은 생각은 대대장 김 성소령이 지휘관으로서 전투력의 핵심인 포술을 평상시 연마하고 주도 면밀한 계획을 수행하여 가까운 사거리를 감당할 수 밖에 없는 대포지만 유효적절하게 운용하여 밀물처럼 밀려오는 북한군을 초기에 분쇄할 수 있었다고 본다.
병력이 1/3 외출을 나가고 장교들이 보수교육을 가고 그나마 포대편제에 5문 밖에 없던 대포중 4문만이 가동이 되었고 지원부대냐 피지원 부대냐의 관계도 없던 시기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건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놓고 주도 면밀하게 사변전에 발생한 신남지구에서의 전투가 포병부대의 전투방법을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축차적으로 질서 있게 철수한 3포병대대는 6사단이라는 부대에 예속되면서 16포병대대라는 명칭을 얻었고 이들은 당시 지급된 M3곡사포를 춘천에서 일부는 경기도 광주 곤지암 그리고 일부는 강원도 원주 충북 충주 그리고 문경까지 끌고가 사용하고 대구에서 포를 반납하고 새로운 대포를 받았다고 하는데 대포를 교체한 건 포탄이 바닦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 연유에는 포탄을 유기하거나 버리지 않고 시민들을 등용하여 민간인 차량까지 징발하여 운송한 덕분이었다.
아무튼 당시 신형 대포(M2곡사포 105mm가 처음 사용된 건 수도사단이 치룬 진천전투로 알고 있고 이때 대전에서 처음 10포병대대(원부대명칭은 7포병대대)가 사용을 했고 6사단의 경우는 대구에 후퇴할 때 까지 M3 105mm를 교체하여 사용했다.
서부전선의 포병들이 1사단 예하(6포병)나 7사단예하 (5포병) 옹진에 있었던 7포병대대가 북한군에게 피해를 보고 상당수 병력이 전사하고 서울에서 그나마 남은 포탄을 기차에 적재하여 철수 했으나 공군기의 오폭으로 소실됨으로서 사용을 못한 경우와 대비되는 예이다.
다음으로 놀란건 당시 차량으로 이동을 해야하는 대포를 운용하려면 충분한 기름이 보급되어야 하는데 보급이 시원치 않았고 식량이 부족하다 보니 휴가를 보내고 외출을 보내는 일일 많았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한마디로 군의 보급이 열악했다는 데 놀랐고 결국 후퇴작전을 하기위해 민간인 차량을 징발하는데 당시 강원도 남부 영월의 광산에 있던 트럭을 썼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식량을 따로 구매하고 군인가족들은 미리 부산(당시엔 동래에 )에 피난시킨 지휘부의 조치가 있었기에 6사단을 포함한 16포병대대의 선전이 있었다고 본다.
심지어 16포병대대는 충북으로 후퇴시에도 전투력이 막강했으며
북한군의 76mm 대포를 노획(아마 동락리 전투가 아닐까?)하여 사용하기도 했다는 것을 보면 부대원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전투력을 발휘했던 것이 분명하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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