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국군 포병의 이야기를 흐르는 대로 했다가 앞으로 갔다가 했다.
사람들은 보통 일찍 창설한 부대에 근무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업적이 많고 오랜 경험이 있어 무시를 못하며 현실을 대처 하는 데 있어서도 적응력이 뛰어난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부대들의 경우 전통이 있거나 없거나 그 시작과 뿌리는 하나이고 무언가 씨앗이 되어 지금의 나무가 되었는데 앞서 말했듯이 1948년 10월 25일이 포병 창설일이며 그전 부터 장교들과 기간요원들은 각 연대나 기타부대에서 선발되 포병훈련소에서 훈련을 거쳐 포병병과를 부여 받았다.
하고 싶다고 의욕이 넘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남다른 각오가 필요했고 중간에 그만두고 떠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포병사령부가 만들어지고 각대대의 기간요원과 장교들은 모병을 해봤지만 어려워서 당시 남한사회에 정착하지 못한 서북청년단을 포병에 입대시키고 그의 가족들에겐 생계를 위해 각종 이권사업과 군관련 산업에 자리를 만들어 남한사회에 정착을 시켰다.
그리고 각 대대는 포병사령부가 만들어질 당시 하나 둘 대대를 창설하는 데 초기 부대의 창설 지역은 영등포 당산동이 이며 한데 모여 있던 여단 규모의 병력들을 1대대(1948.12.7) 2대대(1948.10.25) . 3대대(1948.11.20). 5대대(1948.11.25) . 6대대(1948.11.25). 7대대(1948.12.20) 총 6개 대대로 편성하고 대전차포를 담당하는 포병부대도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차이는 있으나 굳이 가장 먼저 만들어진 대대라면 2대대로 훗날 50대대로 변하는데 이 부대가 포병학교 교도대대가 되며 현재는 8사단 예하에 있다.
그러나 포병사령부를 만들며 대대를 나눈 것이기에 어디가 빠르고 어디가 느리다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이 부대들이 씨앗이 되어 38선을 경계하는 부대의 화력지원이 이루워 졌다.
초기 완전한 편성이 되지 못하고 화포가 다 구비되지 못해 일단 급한 지역에 배치를 하기도 하고 이동을 하기도 했다.
(기사문리 포격사건)
동해안 강릉을 시작으로 1대대가 3대대는 춘천에... 특히 5대대는 강릉에도 있었지만 6.25직전 양주와 의정부에 배치되었고 6대대가 파주에 7대대는 수경사 소속이었지만 옹진으로 작전지역을 이동한다.
그리고 2대대는 앞서 말했 듯 용산의 포병학교 소속이었다.
이들 중 전쟁이 발발한 후 격전을 치룬 후 장비와 병력을 그나마 잘 보존한 부대는 강릉의 1대대와 춘천의 3대대 정도 였다.
그러나 6.25가 나고 난 후 이 부대들의 명칭은 바뀌고 그 이름이 지금까지 남아 있고 주로 이 부대들은 6.25 당시 있던 사단의 번호를 붙인 경우가 많다.
7월 이후 1대대는 8사단을 지원했던 부대라 18대대로 교도대였던 2대대는 50대대로 명칭이 바뀌고 3대대는 6사단을 지원했기에 16대대로 5대대는 7사단을 지원 했었기에 17대대로 6대대는 1사단을 지원했기에 11대대로 7대대는 10대대로 명칭이 바뀐다.
그러나 전쟁이 지속되면서 배속부대가 바뀌었으며 초창기 포병사령부에 소속되었던 부대들은 주로 전방의 사단포병으로 남아서 지금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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