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이야기 247

진정으로 강한 ? 군대

간혹 군을 제대한 사람들이 모이면 어디가 훈련이 더 쎄고 누가 강하다? 자부심이 지나쳐 술자리에서 싸움을 하거나 인터넷에서도 시끄럽다. 싸움하면 운동선수 출신이나 격투기 선수가 가장 잘할 것이고 사격은 사격선수가 가장 잘 할 것이다. 군대는 개인의 전투력도 중요하지만 조직력과 상황전파 군수체계에 따라 결정되는 건데 사람들은 군기잡기나 악쓰기 또는 겁주는 것이 많은 것이 전투력 상승에 기여하는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런 부분이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과학화되고 체계화 되면서 전문가 집단으로 변화고 준비된 사람들이 조직을 지탱하고 비젼을 제시할 때 발전하는 것임에도 아직까지 악기와 깡으로 군을 유지하고자 하고 과거 선배들 중 그것이 군인정신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얼마전 TV를..

군대이야기 2020.01.09

누군가 버리고 간 전역기념액자

골목길에 누군가 버린 전역기념액자가 방치되어있다. 한 30여년 된 것 같은데 아마 집에 걸려 있다가 공간을 차지하고 자식들이 군대갔다가 올 나이가 되니 버린 것 같다. 아니면 이사 가면서 짐이라고 생각하며 버렸을 수도 있다. 30여년전 군대복무개월이 30개월 정도 였을 때 한달 봉급이 7000~10000원, 현역병에서 뽑혀 계급을 단 일반하사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의무경찰정도의 봉급을 주었던 것 같다. 약 6~70000원 정도... 이 돈을 받으면 내무반비를 거둬 청소용구나 부대 비품을 사고 제대하는 선임들에게 기념패나 액자를 사준다고 돈을 내고 또 갑자기 누군가 돌아가시거나 간부들 결혼하거나 하면 돈을 냈었다. 몰인정 할 것 같지만 십시일반으로 돈을 만들어 낼 것 내고 만약에 부족하면 동네 가게 주인에게..

군대이야기 2019.12.17

해군의 안타까운 사고를 접하며

귀국한 해군 함정에서 사고가 나 수병 한명이 순직하고 여러명이 다쳤다. 언론에 다 보도 되지 않지만 안전사고로 죽는 병력들은 한달에 수십여명 정도에 이른다. 차량전복사고나 충돌로 죽는 경우가 의외로 많고 훈련이나 총기사고 같은 경우는 생각보다 적은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군생활 할 때도 제대 이후 차량전복사고가 나서 순직자가 발생했고 부대원들은 너무 슬퍼했고 가족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대전현충원에 묻혔고 몇 년 같이 군생활 한 사람들은 모여서 추모를 했지만 곧 잊혀졌다. 결국 그 고통은 가족의 몫이었다. 나도 가급적 군대를 제대하면 그당시 생활은 잊고 싶었고 기억하기 싫었다. 아버지도 군에 오래 계셨었고 교통사고로 후송도 여러번 다녀오셨고 고생을 하셨는데 군대에 대한 기억은 잊고자 하셨다. 그..

군대이야기 2019.05.28

공사장에서 발견되는 폭발물

과거 초등학교나 오래된 학교 담공사를 하거나 운동장 작업을 하면 폭발물이 많았다. 아무래도 전시가 되면 군인들이 숙영하고 특히 포진지를 만들 때 가장 좋은 곳 중의 하나가 학교 운동장이다. 일단 굴곡이 없고 미리 측량해 놓은 경우가 많고 진입로가 넓어 차량의 이동이 용이한데 문제는 진지가 잘 노출되기에 바로 쏘고 이동해야 한다. 이동을 하는 과정에서 포탄을 다 소모하지 못하거나 트럭에 적재 못해 급하게 땅에 묻거나 못쓰게 폭파시켜야 하는데 불발이 되거나 해서 방치되어 땅에 묻힌 걸 고물상이나 만간인 특히 어린이들이 가지고 노는데 특히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게 신관(Fuze)으로 눈금이 있는게 시간을 맞추는 시한시관이며 땅에 떨어지면서 폭발하는 신관에 delay라는 표시가 있을 경우 지연이 되는 신관으로 탄..

군대이야기 2019.05.11

KH-179 155mm 곡사포 모형

KH-179 155mm곡사포는 우리군 국산으로 개발하여 만든 중곡사포로 K-9자주포를 만들어 내는 기반을 제공한 장비이다. 구형 M114의 최대사거리가 14km정도 인데 이 대포는 보통탄 사격시 24km 로켓보조추진탄(RAP) 사격시 30km가 최대사거리다. 179란 말은 미군의 장비로 부터 화포를 독립하기 위한 시작년도 1979년도를 말하며 80년대 중 후반 우리군의 사단포병의 일반지원 포병대대나 군단포병의 견인 곡사포 대대의 장비로 배치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모형으로 당연히 나온 적도 없고 그 기반인 미제 M114 155mm곡사포도 우리나라 모형회사에선 발매되지 않아 구하기 어렵고 70년대말 영국의 것을 복제한 것이 나오긴 했으나 구할 수 없었다. 약 25년전 절판된 이탈레리 모형을 한정판으로 ..

군대이야기 2019.05.06

국군포병의 시작. 종편

의정부 전선에 투입된 포병 2대대는 3개 중대로 분산되어 있었고 그 중 2중대의 6번포를 끌어내서 축석령의 길에 배치하고 전차를 기다린다. 당시 포의 사수는 김풍익소령이 하고 방향포경과 포신을 전차의 출현방향으로 향한 후 기다리며 방아끈을 잡아 당기는 부사수는 포중대장 장세풍대위가 담당한다.(당시 대전차 포탄을 썼다고 전한다.) 전포대장 최진식 중위는 축석령 후방에서 남는 포를 방열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다. 길위에 나타난 전차를 발견한 2 포병대대 2 중대의 6번포는 한점의 망설임도 없이 전차의 궤도에 일격을 가한다. 선두의 전차는 정지 시켰으나 갑작스럽게 방열을 하느라고 위장이 안된 대포는 바로 발견되어 전차포의 사격을 받고 전원 전사한다. 북한군의 전차는 앞 전차의 충격으로 의정부 진출이 지연되고..

군대이야기 2018.12.04

국군포병의 시작.14

개전 초기 북한군의 접근로 중 가장 화력과 기동력 병력들이 물밀듯 들어온 곳이 1사단 지역인 개성지역 그리고 7사단 지역인 동두천 포천지역이었다. 개성지역의 경우 강폭이 넓고 다리를 통한 접근이 시간을 지연시키는 측면이 있었으나 동두천 포천의 경우 자연 장애물이 적은 편이 었고 철도를 따라 또는 도로를 따라 북한군의 전차전력이 가장 강력하게 밀려온 지역이었고 초기 전선을 지키던 병력들은 순식간에 희생되었고 여러부대에 분산되어 있던 포병5대대(17포병으로 개칭)는 화력지원 임무를 제대로 실행 못하였다. 7사단으로 동두천을 대전에 있던 2사단을 급히 전진 배치하여 동두천 우측의 포천 방면에 배치하기 시작하지만 북한군의 강력한 공격에 속수무책이었고 어느 나라 전사에도 찾아 볼 수 없는 터무니 없는 병력배치가 ..

군대이야기 2018.12.04

국군포병의 시작.13

춘천의 3 포병대대(16포병으로 개칭)가 동란 초기 활약을 하여 강력한 침략군을 격퇴했다면 영동지방의 침략군을 격퇴한 포병은 1포병대대(18포병으로 개칭)였다. 이 부대는 대대장 부터 서울로 출장을 나가서 부대에 없었으나 사단사령부가 가까운 지역에 같이 있었기에 협조가 가능했던 것이 다른 지역의 포병에 비해 작전의 효율성을 높였던 것 같다. 또한 타지역에 비해 전선의 길이가 짧은 것도 유리한 점이 었다. 일례로 6사단의 경우 사단 사령부는 원주였고 7연대와 3포병대대는 먼거리인 춘천에 있었다. 지금이야 춘천과 원주 사이에 고속도로도 있고 교통이 편리하지만 과거엔 상당히 불편했고 원주에서 춘천을 가려면 기차를 타고 서울 청량리를 거쳐 가는 것이 더 편리했던 시기였다. 그에 비하면 강릉의 사령부와 인근의 1..

군대이야기 2018.12.04

국군포병의 시작.12

당시 포병3대대는 다른 부대에 마찬가지로 포대장과 참모 몇은 서울로 교육을 갔었고 군수장교였던 김운한 중위가 작전장교를 겸하고 있었다고 한다. 포병의 편제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군수장교가 작전장교를 겸임했던 걸 보면서 당시 상황이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고 인사장교가 정보장교를 겸임했다는 것 또한 당시의 상황이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다. 교육을 가더라도 대대참모의 경우는 대리로 근무할 장교가 있어야 했다. 그 어려운 가운데 자리를 지킨 김운한 중위의 증언에 따르면 춘천전투에서 특히 포병의 승리는 하늘이 도운 전투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나의 작은 생각은 대대장 김 성소령이 지휘관으로서 전투력의 핵심인 포술을 평상시 연마하고 주도 면밀한 계획을 수행하여 가까운 사거리를 감당할 수 밖에 없는 대포지만 유효적..

군대이야기 2018.12.04

국군포병의 시작.11

1950년 6월 개전이 되기전 다른지역도 그렇지만 인제의 신남지구에서 49년 접전이 일어난다. 당시 1개대대의 북한군을 섬멸하는 데 당시 포병도 참여를 하는데 아마도 포병 중대급이 지원을 했던 것 같다. 당시는 지휘관이 사탄관측 사격요구 부터 사격명령을 관측소에서 주도했다고 한다. 그러나 6.26 이후 포대장은 후방인 전포대에 위치했고 관측장교가 사격요구를 했다고 한다. 중요한 건 당시의 화력지원은 보병연대를 포병이 지원하기 위한 협조나 연락체계는 거의 없었고 보병은 보병대로 포병은 포병대로 싸우다 전면의 소총부대가 돌파당하면 전면에 사격을 하다 최후엔 영거리 사격(시한신관에 눈금 0을 맞추고 바로 쏘면 바로 앞에서 폭발)을 하는 위험한 격전이었다. 특히 신남지구에서의 전투를 거울 삼아(박격포 공격에 취..

군대이야기 2018.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