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297

경기남부의 읍락들

수도권엔 인구가 많이 증가하고 성장한 곳도 있으나 과거에 비해 위축되고 조용해진 곳도 있다. 서울의 인구가 증가하고 80년대 부터는 역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신도시가 만들어지고 서울의 남쪽에 많은 인구가 모였다. 성남은 70년도 초 광주에서 분리가 되고 안산같은 경우엔 80년대 반월출장소라는 이름으로 당시 시흥군 화성군의 땅이 합쳐져 만들어지며 80년대 말 군포, 의왕, 과천은 시가 된다. 용인도 급속 팽창하지만 기흥이나 수지같은 경부선 라인과 이곳을 벗어난 동쪽 지역은 사는 형편이 달랐지만 인구의 변화 또한 달랐다. 아무튼 과거엔 지금의 기초자치 단체 정도의 관청이 있던 경기 남부의 지역은 면으로 축소되거나 이름 또한 잊혀진다. 지역민들의 정체성이 약화되고 사는 형편은 타지역에 비해 다소 위축이 될..

역사이야기 2020.08.25

청포도와 이육사

청포도는 일반포도와는 달리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 구분하기 어렵다. 전문가가 아닌 이상 포도는 먹어봐야 익은 걸 가늠할 수 있다고 본다. 과거 초등학교시절을 보낸 곳 근처엔 청포도밭을 하는 농원이 있었고 이맘때 쯤 포도가 익어가면 사서 먹기도 하고 대량으로 사서 항아리에 술을 담궜다. 지하실이 있는 건물에 살았는데 지하실엔 청포도 술이 익고 있었고 잘사는 집은 아니었으나 아버지는 사람들을 불러 술을 나눠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매실청 같이 설탕도 좀 넣고 숙성시킨 용액으로 포도주라고 말하긴 좀 그러했지만 사람들은 좋아했었다. 아무튼 학교 선생님께도 포도를 갖다 드린적이 있었다. 시 '청포도'를 지은 육사 이원록 선생의 고향 안동은 사과 같은 과일이 유명하지 청포도 같은 건 잘 재배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청포..

역사이야기 2020.08.21

8.15광복의 의미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었다. 당시 일본의 항복을 안 사람은 몇 안되었고 진짜 '도둑같이'찾아 왔다. 서울 거리도 조용했다고 하며 시골의 5촌 아저씨는 일본군 징집에 응하기 위해 가던길 소식을 듣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 술렁였고 상황은 변했고 광복이 되었음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군은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며 긴장을 풀지 않았고 중국에서 미국수송기를 타고 온 광복군 병력과 미군들의 착륙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다시 왔던 길로 돌아 중국으로 가는 상황이 펼쳐졌다. 일본은 미국에 항복을 한 것이지 조선의 독립은 인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무척 더운 해였고 정부를 미리 준비했지만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당시 공립중학교가 기초자치단체에 새로 세워지고 일제 강점기 부터 있..

역사이야기 2020.08.16

풍수지리와 자연재해

조상들이 집터를 잡을 때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것이 장풍득수 바로 바람을 막고 물을 구한다는 풍수에 적합한 곳이 었다. 잘 생각해 보면 고을 주자가 들어가는 곳이나 목이나 부 그리고 현이 들어가는 곳을 보면 홍수피해가 적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고 산업이 발달하면서 많은 도시들이 바다가 그리고 강가 같은 수운이 잘되어 있는 곳에 자리 잡으면서 작은 홍수나 태풍은 피해가겠지만 큰 홍수나 태풍 해일을 피하기 어렵다. 현재 서울을 보더라도 4대문 안의 경복궁 뒤는 배산임수 지형이라 홍수피해가 적으며 있었다면 인간의 간섭 때문이다. 부산 또한 지금은 커다란 도시지만 과거엔 금정산을 뒤로한 동래부가 중심이었고 바다가 있는 바닷가나 수영은 한적한 어촌이며 병영이었다. 목포를 관할한 나주 또한 그랬고 인..

역사이야기 2020.08.12

춘원 이광수의 변절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흙'이란 제목의 소설책 2권이 집에 있었다. 표지엔 누런 황토가 사진으로 찍혀있고 작은 글씨로 쓰여진 장편소설이었다. 평안도가 고향인 시골 총각 ' 허 숭'이 서울의 전문학교를 나와 고시에 합격도 하고 권력도 있는 부자집 딸 '정선 '과 결혼을 한다. 권력과 지위를 추구하기 보다는 힘들고 가난한 고향의 사람을 돕고자 나서고 자신과는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지만 불륜을 저지르고 자살을 하려고 한 '정선'을 용서한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고시낭인 '갑진'은 정선과 불륜을 저질렀지만 반성하고 검불랑이라는 곳에 가서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반성하고 촌락에서 계몽운동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영화로 과거에 만들어 지고 유명했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으며 이 소설을 쓸 당시 적어도 이광수는 최남선 ..

역사이야기 2020.07.28

영화의 고증

영화는 예술적 측면도 중요하지만 관객을 많이 동원하여 돈을 벌어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특히 역사관련 영화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하는 것은 자세한 고증과 요소요소 헛점이 드러나서는 안된다.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를 따라 하자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만는데 있어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고 관련된 산업을 발달시키며 돈을 벌어 스텝들도 독자적 영역을 확보 전문화되고 학계의 관심도 만들 수 있다. 주로 동원하는 관객이 20~30대 성인여성이나 40~50대 여유있는 장년층을 겨냥해서 만들다 보니 배우의 연기나 외모에 비중을 둔다. 요소 요소 등장하는 셑트나 당대에 쓰인 소품을 확보해 놓았을 때 유발할 수 있는 효과도 크다고 본다. '응답하라 1988 '같은 드라마를 만들면서 배우의 복장이나 집집 구석에 나오는 소품까..

역사이야기 2020.07.21

백선엽 장군

백선엽 장군이 별세했다. 우리군의 상징적 인물이며 격동기 파란만장한 생을 산 사람이다. 일제 강점기 태어나 어려운 형편을 극복하고 당시 인재들이 모이던 평양사범을 마치고 교사로 일을 하다 만주에 있던 봉천 군관학교를 나와 만주군장교가 되어 우리나라 사람들로 구성이 된 간도특설대에 복무하며 지역의 항일세력들과 싸웠다.(이 항일세력은 이념적으로 보면 국민당 쪽이 아니며 팔로군들이었다.)그러다 소련군에게 무장해제를 당하고 해방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나 자신의 뜻과는 다른 세상이 전개되자 남으로 와서 그간의 군경력을 인정 받아 군사영어학교를 나와 국방경비대 장교가 되며 그 후 국방경비대는 대한민국 육군이 된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념과 사상갈등으로 숙청되지만 백선엽은 그 중심에서 자신의 인맥과 경험을 ..

역사이야기 2020.07.11

남북관계의 악화

우리나라와 북한의 관계가 경색국면으로 들어섰다. 남에서는 탈북자 관련 단체들이 북쪽에 대북전단을 살포하고 북한에서는 정부차원에서 대규모로 전단을 뿌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 전단지 (삐라) 살포의 역사는 오래되었고 6.25 동란 시기에도 있어왔다. 종이폭탄이란 이름으로 양측은 엄청난 양의 전단지를 뿌렸고 80년대 초까지도 경기도 뿐 아니라 비교적 아랫녁인 충북일대에 뿌려졌으며 인근 군부대나 경찰관서에 가져다 주면 연필이나 공책을 주었고 학교에서도 수거함이 있었다. 종이의 재질도 특수해서 잘 망가지지 않았으며 내용을 읽지 말고 가져 오라고 하지만 집는 순간 눈에 들어오는데 주로 우리정부를 욕하는 내용이었다.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봐주는 것이 아니었고 마치 우리나라의 애국시민들이 뿌린 듯 살포되었으나 북..

역사이야기 2020.06.27

6.25 사변 70주년

6.25가 일어난지 70여년이 지났다. 북한의 기습남침이 새벽에 있었고 대한민국은 휴일아침 군을 믿었으나 군수뇌부는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다. 지휘권을 위임받은 지휘관들과 장교들은 자신의 부대를 파악하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그전에 국지도발로 서로간의 총격전과 포격전이 있었고 전방의 상황을 상부에 보고 했으나 그에 따른 확실한 대비가 없었다. 오히려 전후방각지의 병기와 차량이 부평의 병기창에 입고되고 실무를 담당한 장교나 병력들이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보수교육을 받고 있는 경우도 있었고 육군본부에서는 술파티가 있었다. 수도권 부대의 경우 동두천 전방의 7사단이 대규모 공격에 마비가 되고 1사단 또한 개성을 내어주고 교량을 절단하고 철수하고자 했지만 쉽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춘천이나 강릉의 경우엔 그나마 병력들..

역사이야기 2020.06.26

밀과 이모작

보리와 밀은 밭에서 재배하는 곡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모내기 직전 수확한다. 보리는 대맥이라 하고 밀은 소맥이라 하는데 아랫녁에서는 모내기를 하면서 이모작이 가능했다. 먹기는 쌀밥이 좋지만 쌀은 세금으로 내고 좋은 날 먹고 다른지역에 팔아 '돈을 사거나' 재물을 사고 아니면 보리나 밀을 대신 먹었다. 쌀농사를 짓지만 쌀을 팔다보니 쌀밥보다 보리밥 또는 밀밥 그리고 콩을 섞은 잡곡밥을 많이 먹었으며 쌀이 귀한 산간지방에서는 옥수수를 말려 부숴 강냉이 밥을 먹었다. 쌀밥이 보편화 된 건 70년대 이며 당시 통일벼라는 쌀품종은 맛보다 우리 국민을 배고품에서 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쌀값은 과거에 비해 많이 떨어졌다. 여기엔 외국에서 수입되는 밀가루가 원인이었으며 국민들의 식생활도 변했다. 조선후기 나라에서..

역사이야기 2020.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