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 23

전쟁기념관 전시물의 고증 오류

간혹 30~40여년전의 기록이나 남아 있는 인쇄물 영화관련 자료, 행사자료를 구하려면 사라지고 없다. 그렇다 보니 70년전의 자료는 더 구하기 어렵다. 아마 미국이나 일본에 더 많은 이들이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끔 전쟁 기념관을 가보면 다양한 전시물 그리고 변화를 주는 노력에 고맙다는 생각이 들고 더군다나 무료입장이라게 고맙고 머리속에 다양한 사실이 안 들어올 때 지나가다 들린다. 그러나 자세히 다가가 모면 오류가 있고 성의가 부족함을 느낀다. 전쟁기념관에 채용이 되려면 실력도 좋아야 하고 외국어도 잘해야 하고 전문지식 또한 높아야 한다. 이곳만 그렇지 않다. 독립기념관의 경우도 그렇고 우리나라에서 난다 긴다 하는 실력자들이 모인 곳이며 단순히 전시만 하는 곳이 아니고 간행물 부터 자료를 만..

군대이야기 2024.03.19

고 김동석 대령 특별전

가수 진미령은 진씨가 아니다. 화교로 알려져 있었으나 잘못된 소문이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첩보부대 HID를 이끌었던 인물이고 육사8기 출신(지청천 장군의 추천으로 입교)이며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 아닌 국민당군 소령 출신이었고 월남하여 김 구 선생 경호원을 지냈다. 그리고 전쟁초기 중대장으로 근무했고 후에 첩보부대를 지휘 전후방을 넘어 적진 깊숙히 부대원들을 보내 작전을 수행한다. 그의 친구중에는 춘천대첩 당시 6사단 16포병대대 군수장교였지만 다른 장교들을 대신 작전을 수행 북한군의 초기 공세를 꺾은 김운한 중위(훗날 장군이 된다.)가 있었다. 이 김운한 장군은 독립운동을 했던 분(감옥에서 김동석 대령을 만난다.)이고 경북 영주가 고향이다 어제가 고 김운한 장군의 기일이었다고 한다. ..

군대이야기 2024.03.17

국사 교육이 좌편향 되었다는 사람들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국사는 대부분 90년대를 기준으로 국정교과서였다. 특히 뒷부분은 학기말에 이루어 지고 과거 반공도덕 같은 과목이나 윤리와도 관련이 있어 공통부분도 많지만 서로 간섭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리고 도덕교과의 경우 2000년대 전 후 통일정책에 대한 자세한 부분을 다뤘고 이는 과거 정부 부터의 일관된 정책에 의하여 교육된 것이다. 박정희 정부의 7.4 남북 공동성명 부터 80~ 90년대 전두환 노태우 정부의 통일정책 그리고 동유럽체제의 변화 구소련의 해체등 다양한 사건으로 인해 동유럽국가 즉 우리가 아는 공산국가와 수교도 하고 김영삼 정부 때는 김일성과 회담이 성사 될 뻔 했었고 그에 따라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도 바뀌고 중국에 들어가 경제활동을 하는 이들도 증가하고 기업도 진출을 한다...

역사이야기 2024.03.15

집에서 만든 도토리묵

전에 용인에 사시는 어머니 한분이 농사를 지었다며 들기름, 참기름, 도토리가루, 검은콩을 보내오셨다. 사서 먹을 수 있지만 직접 기르고 짜고 산에서 도토리를 모아 말려서 가루를 빻아 보냈는데 처음엔 미수가루인가? 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일요일 도토리가루를 물에 불리고 따로 물을 끓여 소금과 들기름 약간 참기름을 넣었다. 물에 불린 도토리 가루 반죽을 넣으니 끈끈한 느낌이 났고 거기에 물을 더 더하고 주걱으로 저어 타지 않게 하고 식히니 모양은 울퉁불퉁하지만 도토리 묵이 되었다. 양도 많아서 일주일 반찬으로 조금씩 내놓아도 좋을 것이고 밤에 심심할 때 먹어도 좋을 것 같다. 어릴 때 어머니가 만들어 이웃과 나눠 먹은 적이 있었다. 도토리는 말리는 과정이 있어야 하고 껍질도 까고 방앗간에 가져가 빻아야 하..

나의 이야기 2024.03.13

한강 인도교 폭파에 대한 것을 찾다가.

영화 건국전쟁의 상영은 그동안 잠시 잊고 있던 6.25와 이승만 정권에 대한 것을 다시 꺼내 보게 했고 자료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이사를 다닐 때 마다 무겁고 귀찮고 어떤 이들은 갖다 버리라고 했으나 버리기 아까운 것들이었다. 특히 한강 인도교 폭파에 대한 사실을 찾고자 인터넷이나 유튜브에 의존을 하지 않고 문헌이나 사진을 찾기 위해 온집을 뒤졌다. 심지어는 자칭 민족 우파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자료도 찾았다 . 아직 확인이 안된 것도 있으나 결론을 내릴 때 까지 구석구석 찾아 볼 것이고 혹시 내가 알고 있던 것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 생각을 해 보았다. 국방부와 육군본부, 유엔군 전사가 기본으로 상황을 이야기 하고 있고 그 당시 다리를 통과하거나 통과전 목격한 것을 적은 것이 있는데 공통적..

역사이야기 2024.03.12

조선이라는 이름을 쓰던 미군정

우리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 미군정을 실시했고 당시 대한민국의 명칭은 임시정부가 사용했고 그 산하의 광복군 또한 존재했으며 장교로 임관 시켰다. 그리고 대한민국 28년 이라고 써있다. 그렇다면 당시 미군정에 의해 만들어진 사관학교(지금의 육군사관학교)는 어떤 이름을 썼을까? 당시 임관하는 장교에게 수여된 영어와 국한문으로 된 졸업증서엔 조선 육상 경비대 사관학교라는 명칭을 썼다. 미군정이지만 '조선'이라는 이름을 썼다. 특히 단군기원을 쓴 것을 보면 이것이 망한 나라 조선이 아니고 그 옛날 '조선'을 의미 하는 것 같다. 자칫 북한이 쓰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나타내는 것 같지만 해방 이후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과정에서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을 놓고 갈등했었다. 국가 명칭을 놓고 정확한 의..

역사이야기 2024.03.11

교육과 문화 그리고 이승만 정권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중에는 교육을 활성화 시켜 문맹률을 낮추고 민주시민을 길러 냈다는 이야기를 한다. 일단은 맞는 부분도 있지만 그 기반을 만든 조직은 미군정과 당시 교육인사들이고 그러함에도 초등학교 교육을 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었고 지역유지들이나 학부모의 회비가 없이는 운영이 될 수 없었고 이 마저도 낼 수 없는 경우 학교를 갈 수 없었다. 정권 초기 초등교육비(초기 70%이상은 후원회비와 사친회비 였으며 완전히 사라진 건 1962년)의 비중은 높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지역 특히 군대가 주둔한 한강이북이나 후방이라도 군인들이 주둔한 지역의 주민들은 군에서 세운 공민학교의 도움을 받아 초등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어 군부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독립운동가로서 이승만이 외교론이다. 해서 나름 합리적이고 강대..

역사이야기 2024.03.10

이승만 정권 이후의 변화

6.25전쟁은 인구비례 군부의 비대화를 가지고 왔고 말은 자유민주주의를 한다고 했지만 일제가 하던 군국주의 보다 인구비례 더 큰 규모의 군대를 (일본군의 경우 대부분은 일본인이었지만)만들었으며 북한 못지 않은 청장년층 남성들이 원하지 않음에도 군인이 되었다. 이것이 좋은 점(청장년들의 교육과 사회화,)도 있었으나 사회에 부정적인 측면을 제시한 부분도 있었다. 전쟁을 치루며 정상적이고 긍정적이지 않은 한쪽으로 쏠린 우리나라의 경우 여당을 견제할 세력이 없었고 군부 또한 정상적이지 않은 집권당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이승만을 이은 박정희 정권은 군에서 전역하거나 퇴역한 인사들을 정치인으로 변신을 시켰고 다른 측면에서는 견제를 하기 위해 이들은 외교라인에 투입한다 외교의 다변화는 쉽지 않았고 속칭 자유..

역사이야기 2024.03.08

6.25와 이승만 독재

6.25 전쟁은 대한민국에 많은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이승만의 독재화를 공고히 하게 한다. 그 시작은 6월 27일 새벽에 입법, 행정, 사법의 인사에게 아무 통보도 없이 비밀리에 서울을 빠져 나간 것 부터이다. 이유는 그 당시 정상은 아니지만 3부 요인들이 서울에 있었고 정부가 작동을 하고 의정부에서 밀리고 있었지만 시민들의 피난 시간을 만들기 위해 많은 병력과 화력이 대응을 하고 있었고 그 무섭다는 전차에 맞서서 육탄으로 맞서고 대포의 직접조준사격으로 접근을 막고 있었고 미군의 항공폭격도 있었고 군 지휘부에 늦게 참여는 했지만 빨리 한강을 건널 수 있도록 소식을 전파했으면 한강교 이외에 철교(적지만 건널수 있는 길이 있고) 이천이나 충청도 쪽으로 가는 이들은 광진교나 아니면 경기 ..

역사이야기 2024.03.06

작은 가게들의 폐업

큰 유통업체가 들어 오면 당장은 싸고 다양한 상품을 살 수 있지만 주변의 가게들은 손님이 끊기고 가게는 문을 닫는다. 돈 앞에서 사람들은 냉정해지고 기존의 단골이고 고객은 의미가 없다. 그러다 보니 직원을 채용하지 않고 무인으로 가게를 운영을 하여 직원 임금을 제외하고 본인이 수시로 가서 물건 진열 하고 청소하고 관리하지만 매출이 적어 가게 임대료나 공과금을 낼 수 없다면 문을 닫거나 업종을 변화시켜야 한다. 내가 학원을 하던 용인의 마평동은 작은 가게들이나 식당이 크지 않지만 여러 군데 많지만 피부로 느껴질 만큼 변화가 심하다. 1년을 못 넘기는 곳도 많고 부동산사무실 같은 경우는 문은 열었지만 안에는 일하는 사장이나 직원이 없고 전화번호만 있는 곳이 많다. 횟집의 수족관엔 물이 말라 있고 간판을 여러..

용인 이야기 2024.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