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6.25와 이승만 독재

lkjfdc 2024. 3. 6. 20:47

6.25 전쟁은 대한민국에 많은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이승만의 독재화를 공고히 하게 한다.


그 시작은   6월 27일 새벽에 입법, 행정, 사법의 인사에게 아무 통보도 없이 비밀리에 서울을 빠져 나간 것 부터이다.

이유는 그 당시 정상은 아니지만 3부 요인들이 서울에 있었고 정부가 작동을 하고 의정부에서 밀리고 있었지만 시민들의 피난 시간을 만들기 위해 많은 병력과 화력이 대응을 하고 있었고 그 무섭다는 전차에 맞서서 육탄으로 맞서고 대포의 직접조준사격으로 접근을 막고 있었고 미군의 항공폭격도 있었고 군 지휘부에 늦게 참여는 했지만 빨리 한강을 건널 수 있도록 소식을 전파했으면 한강교 이외에 철교(적지만 건널수 있는 길이 있고)  이천이나 충청도 쪽으로 가는 이들은 광진교나 아니면 경기 동부의 산간으로 피신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고 본다.

군병력 중 절반이상이 건너지 않은 상태에서 다리를 폭파시킨 건 이후 군병력을 만들어 내는데 막대한 노력이 들어가며 많은 청장년들이 군인이 되어 많은 수가 전사한다.


당시엔 라디오가 적어서  증언자들에 의하면 벽보를 통해 소식을 알렸는데 '이기고 있다'는 식의 안내만 있었고 고위공직자 중 소식을 빨리 받은 이들만 피신을 했고 대부분은 남아 있다 봉변을 당하거나 유능한 인재들은 납북을 당했고 북으로 전향을 했다.

중요한 건 27일 국무회의를 대통령이 예정해 놓고 혼자 그리고 부인  소수의 수행원만 데리고 대구까지 갔다가 대전으로 올라왔다고 하니 이후 주변의 국무위원과 특히 자신을 견제하는 국회의원의 숫자도 줄어들었으니 대통령을 견제할 인사들은 전쟁전 보다 감소했고 군과 국민은 대통령에게 더 의존을 하게 되었으며 이 후 부산에서 발췌개헌을 통과시키기 위해 계엄령과 함께 야당국회의원들을 구금한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대전에서 방송을 하여 서울을 떠나라는 식의 방송을 했다고 하여 대통령에게 면죄부를 주는데 당시 라디오는 대중적인 안내를 할 수 있을 만 큼 보급되지 않았다

이후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은 많이 무시되고 6.25를 겪은  이들은 월남한 사람들과 방공 보다 더 강한 '반공' 또는 '멸공'을 주장하였는데 당시 공산군의 통치를 경험한 이들 중 북한에  우호적인  앞잡이가  노출이 되어 많은 피해를 주고  수복후에 많은  피해를 보기도 하면서  월북을 하면서  많은 수가  사라진다.

반대할 세력이나 혼란을 부채질 할 세력이 줄었으니 이승만의 독재는 더 강화되었고 중도파의 힘은 더 약해졌다.

전쟁은 이승만 정권을  견제할 조직이나 국민들을  줄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공산주의자를 용인하고 이들을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기회로 용서받지   못한 친일세력들은 기세가 더 커졌고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기회주의적인 속성을 갖게 되고 우리나라의 정치체제는 자유민주주의라고 말하기에는 모순된 측면이 많았다.

좌익이 몰살되고 월북을 하니 남아 있던 다수의 국민들도 눈치를 보게 되고 특히 시골에 살던 많은 이들은 좌우의 틈바구니에서 많은 피해를 보다 보니 먹고 사는 문제도 있고 익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도시로 이사를 하고 이러한 문제는 기반이 열악한  도시의 급격한 팽창과 함께 기존의 농어촌에서 살던 이들에게는  문화적인 혼란 그리고 도시에는 외지인들이 들끓으면서 다양한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지역에 대한 편견이 만들어 졌다고 보며 황금만능주의는 과거 보다 더 심해졌고 이웃은 물론 친 인척과 거리를 두며 자신의 직계 가족중심으로 문화가 재편된다.


극좌나 공산주의자가 감소한 대한민국에서 중간 쯤에 있던 이들은 눈치를 봤고 그러함에도 실정을 거듭한 자유당 정권은 버림을 받게 된다.

심지어는 같은 편이었던 사람들도 외면을 한다.

그리고 이승만에 대한 기록과 평가도 긍정적이지 않았다.

내가 소개하는 자료는 대부분 정부측 인사들이나 관계기관의 부탁을 받고 만들어지고 기록된  자료이다.

전쟁기념관, 국방부, 육군본부 그리고 유엔군 자료, 교과서를 보고 이야기를 함에도 건국전쟁을 못봐서 떠드는 미친놈으로 생각한다.

자료를 사진까지 다 올리면 좋지만 저작권 문제가 가장 크다.

역사교육 또한 좌파가 집권해서 전교조 교사들이 공부를 가르쳐서 그런 것이 아니며 뒷부분에 나온 내용을 자세히 보지 않거나 시험의 도구로만 이용했던 부작용이 유튜버나 일부 논객들에 의해 포장되고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토지개혁의 긍정적 결과는 근현대사교과서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했음에도 안 배웠다고 하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500원짜리 문구점에서 팔던 복사된 자료(싸다고 틀린 것은 아니다.)에도 '대동강 피난 장면'은 정확하게 나오고 근현대사 교과서에도 정확하게 나오는 사실을 좌익의 주장이니 역사학계가 썩었니  하는 주장은 이해할 수 없는 문제이다.




더 웃기는 건 전쟁기념관이나 독립기념관에서 이달의 인물을 소개하고 있고 정부의 집권과는 상관없이 소개가 되고 발굴이 되고 있는데 자신이 모르고 찾아보지 않고 좌빨의 책동이라고 말하는 무식과 무관심은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 않는 사람들에겐 이상한 논리이고 주장일 뿐이다.


제발 눈과 귀를 열고 자료를 찾아 봤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