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395

만두가 Service

얼마전 모 프로에서 '군만두'를 영어로 뭐라고 하냐? 는 질문에 'service (써비스)'라고 해서 웃었다. 웃다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고 다른 만두 보다 희소성이 떨어지고 뭔가 무시 당하는 게 씁쓸했다. 만두 하면 옛이야기에도 여러번 등장하고 중국 , 일본, 우리나라, 베트남 등지에서 전통음식으로 다양하게 발전을 했고 한끼 식사 뿐 아니라 특별한 요리로 대우받던 음식이다. 재료도 다양하고 조리법도 다양해서 찌거나 굽거나 튀기거나 해서 요즘엔 사시사철 먹을 수 있고 슈퍼 냉장고 마트 냉장고에도 꽉 차있다. 그러나 과거엔 명절이나 겨울에 주로 집에서 만들었고 분식집에서 전문적으로 만들었고 중국집에선 특별하게 군만두라고 해서 정확히는 기름에 살짝 튀긴 경우도 있었고 바짝 튀기기도 했는데 수타면 처럼 손이..

나의 이야기 2021.11.22

꿀벌과 꿀채집

꽃을 돌아 다니는 벌들은 한가지 같지만 종류가 다르다. 꽃이 사라지기전 꿀을 만들기 위해서 일까 ? 양지쪽 화단에 여러종류의 벌들이 돌아 다니는데 대부분 토종벌이기 보다는 외래종이며 이들은 토종보다 약간 크다. 봄과 여름 일반벌들이 아카시아나 밤꽃을 다니거나 여러 종류의 꽃밭을 다니며 꿀을 만드는데 반해 토종벌들의 경우는 제한된 영역과 깊은 산에서 자라는 다양한 야생화로 부터 꿀을 만들고 그양이 작으며 이렇게 모은 꿀을 바위틈에서 구하면 '석청'이고 오래된 나무 구멍이나 틈에 집을 짓고 꿀을 모으면 '목청'이라고 하는데 이런걸 구하여 파는 경우는 어렵기에 비싼 걸 떠나 구하기도 어렵다. 맛도 맛이지만 몸에 좋다고 하는데 작은 벌들이 모은 것이기에 그 귀함과 가치가 돈으로 만 따지기엔 어렵다고 본다. 토종..

나의 이야기 2021.11.18

돼지족발요리

족발은 집에서 만들기 보다는 사먹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의 족발이 전통음식은 아니라고 하며 비슷한 것이 황해도지방에 있었다고 한다. 남한의 전통음식들도 변화가 많았지만 북한의 경우도 변화가 많고 특히 개성이나 평양은 음식이 대단했다고 하는데 사회주의 체제가 되면서 사라진 것도 많고 변한 것도 많아 과거의 음식이 되었다고 한다. 족발은 앞다리로 큰 걸 사다가 해야 음식점에서 파는 것 같이 될 것 같은데 큰 것을 못구해서 작은 것 몇개와 덩어리를 사서 끓여 만들어 보았다. 10시간 물에 담근 후 꺼내서 간장, 양파 , 배, 마늘, 물엿, 설탕 그리고 월계수 잎과 후추를 넣고 2시간 가량 끓였다. 한약재를 여러가지 넣기도 하는데 갑자기 마련할 수 없으니 1000원 정도 하는 쌍화탕을 넣었고 혹시 배가 비싸다면..

나의 이야기 2021.11.09

일찍 찾아온 추위

한달 먼저 추위가 온 것 같다. 마치 11월의 하순을 보는 것 같고 김장철의 느낌이 난다. 5일전까지 반팔의 옷을 입고 에어컨을 가동했었다. 사람의 마음의 변덕스러운게 8월엔 돈좀 생기면 에어컨을 추가 설치해야 겠다는 구상을 했었는데 이젠 학원에 난방을 어떻게 할까? 생각중이다. 영상 3도 정도니 산간지방이나 경기북부나 강원도 내륙은 영하로 내려갔을 것 같고 낮에 기온이 오른다고 하는데 다른 것 보다 농사짓는 분들의 고민이 많을 것 같다. 아직 마트에 가면 포도도 나오는데 잘익은 감과 대추가 가득하고 뭔가 이상하다. 아직 가을이 머물러 줘야 하고 그래야 생각할 것 정리할 것 마무리 할 것이 있는데 너무 빨리 가는 것 같다. 공부는 안하지만 책도 좀 보고 눈오기전 오르막길 내리막길 산책좀 한 뒤에 국화꽃도..

나의 이야기 2021.10.21

박병희 선생님의 시집

벌써 20년이 넘었다. 학원에 근무하다 보면 다양한 이력을 가진 강사들이 근무를 했다. 70년대 입시학원이 대도시에만 있을 땐 규모도 크고 학교에 몸담았던 교사들이 나와 차린 경우도 있었고 대학교 시간 강사를 하던 교수들이 나와서 학원에서 수업을 하기도 했는데 지금도 이런 분들이 있다. 또한 사관학교에서 교양과 전공수업을 하던 예비역 교수들도 있었고 전교조 문제로 학교에서 해직 당한 후 학원에 왔다가 복귀하지 않고 눌러 앉아 직업으로 이어간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80년대 과외금지 조치와 재학생 학원수강 금지가 선포된 후 학원계를 떠나 사업을 하다 다시 90년대 재학생 관련 보습학원이 문을 열자 40이 넘은 나이(지금은 내가 이 나이가 넘어서 어려 보이지만 20대 30대 땐 대단한 경력과 카리스마가 느껴..

나의 이야기 2021.10.09

박경석 장군님이 보내주신 작품들

세상의 인연이란 얼굴을 직접 대하면서 만들어 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인터넷을 통하거나 책을 통해서 연결이 되기도 한다. 이사를 많이 다니고 고향에서 뿌리를 내린 것이 아니고 고향이 있지만 아는 분들이 생존해 있지 않은 나는 많은 인맥이나 동문 친구가 많지 않고 혹 아는 이가 있어도 내가 감당이 안되면 이것 저것 챙기거나 자주 만나지 못한다. 직접 못 만나지만 인터넷을 통해 아는 분이 몇 있고 이분들의 경우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앞으로 갚아야 할 것들이 많다. 인터넷이 활성화 되기전에는 만남이나 대화가 별로 없었고 서점을 다니다 우연히 책을 사서 보고 알게된 작가 중엔 여러 논란을 일으키는 지만원박사도 있었고 (90년대까지만 해도 여러 저서에 나타난 생각은 지금과 달랐고) 또한 전..

나의 이야기 2021.09.09

참깨 말리기

요즘 수확하는 작물중에 참깨가 있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을 보면 문을 여는 암호가 ' 열려라! 참깨!'라고 해서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인줄 알았으나 실제 암호를 참깨(sesame)라 했던 것 같다. 인도나 서남아시아 쪽에서도 재배하는 작물이고 식용이나 다른 용도로 쓰였으며 우리나라엔 비단길을 거쳐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고 들었다. 참깨의 기름은 진유(참기름)이라고 해서 여러가지 용도로 쓰였는데 일반요리에 조금만 넣어도 맛이 달라지는 재료이다. 요즘 파는 참기름의 상당수는 깨의 수입국이 외국이며 국산깨를 짜셔 기름을 만드는 건 비싸다 보니 깨의 분말을 수입하여 짜기도 하며 고소함을 더하기 위해 고온으로 볶다 보니 몸에 좋지 않을 수 있다고 들었다. 오랜기간 재배되면서 우리땅..

나의 이야기 2021.08.10

제사의 기억

이맘때 제사를 모신다. 더운 날씨라 신경이 쓰이고 사전에 시장도 봐오고 동생들도 전화가 온다. 작년부터는 얼굴을 못봤고 집에서 조용히 지낸다. 종가집이 아니다 보니 일년에 몇 번 없긴 하지만 아내에겐 일 마치고 와서 해야 하는 부담이다. 생각해 보면 과거 큰 집의 제사는 많았고 차리는 음식이 많았던 것 같다. 육지속의 섬같은 곳으로 황강이 앞과 옆으로 낙동강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취락으로 조선시대엔 강을 통해 올라오는 배들이 있었고 인근 달성의 구지면나 창녕의 이방면으로 장을 보러가고 흥청거렸다고 하지만 70년대엔 쇠락했고 육상교통은 면소재지에 일제강점기 버스가 들어왔으나 원래 다른 면이었던 큰집으로 들어오는 길은 전마선을 타고 와야 하는 불편함과 함께 전기도 70년대 말 80년대 초 들어왔으니 타..

나의 이야기 2021.07.17

장마와 파전

장마가 시작되었다고 했다. 비가 열린 창문사이로 들어오고 시원하다. 더워진지 조금 되었지만 여름 또한 한달 반 정도 지나면 끝이고 가을이 된다고 생각하니 시간 또한 빨리 가고 있다고 본다. 코로나 이후 누군가를 만나거나 약속을 하거나 하기가 어려웠고 때문에 궁금하며 어떠한지 마음은 있는데 쉽지 않다. 개인적으로 백신 1차 접종을 했지만 사람들을 상대하고 말을 많이 하는 일이라 조심하고 신경을 쓴다. 술을 마시거나 함께 흡연을 하는 것을 과거엔 즐기고 좋아했다. 새벽에 들어가는게 다반사였고 담배는 끊지를 못했었다. 지금은 대부분 끊었으며 가끔 막걸리 한병을 사와 집에서 마시는 걸로 끝이다. 술과 흡연 자체보다 담소하는 것에 의미를 뒀었는데 언제 부터인지 같은 일을 하던 분들이 은퇴를 했거나 다른 일을 하고..

나의 이야기 2021.07.09

변압기에 대한 기억

70년대말 110V를 쓰던 시기 시골로 이사를 갔다. 당시 전자제품은 220V로 변화하고 있었고 시골은 220V로 전환이 되어 있었다. TV는 110V밖에 쓰지 못하는데다가 서울의 남산이 멀어 전파도 잘 잡히지 않아 동네는 큰 규모의 공동안테나를 사용했으며 비용을 내야 했다. 컬러TV가 들어 온다고 했지만 당시 시골엔 흑백TV 조차 없는 집이 많았다. TV는 여전히 비쌌고 월부로 들여놨으며 들여 놓으면 이웃에서 찾아와 보기도 했다. 다양한 전자제품이 국산화되어 보급이 되는데 금성이나 삼성에서 나오는 것들이 팔렸고 대한전선 같은 곳에서 만들어 팔았고 부산을 통해 흘러온 일제물건이나 베트남전 이후 들어온 카셑트 라디오 같은 것도 있었지만 어떤 지역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도 있었다. 동네전파사는 호황이었고..

나의 이야기 2021.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