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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볼 수 없는 관광지 기념연필

지금은 관광을 가도 뭔가 사오거나 사서 보내거나 하는 일이 잘 없다. 집에서 인터넷을 이용 대부분 주문하고 택배기사님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 현실이 되었다. 과거에도 전신환을 보내 물건을 주문하고 우체부 아저씨를 기다리던 시기가 있었고 8~90년 전에는 일본이나 만주에 책 같은 것을 주문 하여 물건을 받았다고 하니 그 기다리는 시간은 얼마나 설레였을까? 7~80년대 수학여행을 다녀올 때 관광지에서 사던 것들은 비슷한 품질이었지만 지역의 특성이 있었고 조금 비싼 느낌이 있었지만 집으로 올 때 누군가에게 주기 위해 돈을 아껴서 사오고 여행을 갔다 왔다는 표시를 내고 적은 양이지만 나누었던 것 같다. 그리고 누군가 여행을 다녀오면 비슷한 것을 받고 기뻐했었다. 지금의 제품과 비교하면 품질도 많이 떨어지고 선물이..

문구이야기 2024.03.22

실제 역사와 소설

역사를 공부할 때 문학을 통해 그 당시 사회를 이해 하는 건 좋으나 사실과 다른 허구가 있음을 따져보고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작가는 작품을 서술할 때 실제 사건에 주인공이나 등장인물을 참여시킬 경우 어느 정도 일어났던 사실과 맞아야 한다. 8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차지 하고 90년대 초 영화로 만들어진 태백산맥은 전라도 보성의 벌교를 무대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해방 이후 미군정 , 정부수립, 여순반란 사건, 6.25등 큰 사건속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80년대에서 90년대 이 소설을 안 읽으면 무언가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이고 대화를 하는데 있어 개인적으로는 무시를 당했던 기억이 있다. 당연히 작가가 전개한 소설의 내용이 시대를 적절하게 표현을 하고 읽으면 해방 이후 역사를 제대로 안다..

역사이야기 2024.03.21

기자들 모아 놓고 하는 발언이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80~90년대에도 군은 민간인을 감시하고 특히 유력 정치인, 정당인, 노동계, 학계인사 그리고 대학의 총학생장들도 그 대상이었다. 그러다가 윤석양 이병이 대규모 민간인 사찰을 폭로하여 큰 충격을 준다. 보안사, 정보사 등 다양한 조직이 있고 군이 탄생할 때 부터 전투력 증진에 주력을 해도 전력을 유지하기 어려울 판인데 군내부에서도 이러한 조직은 일선부대 병력들과 지휘관까지 위축되게 했고 그 원인엔 군이 시작될 때 부터 다양한 사상과 경력 그리고 국내에만 살던 것이 아닌 중국 일본, 동남아 그리고 구소련에서 태평양 전선에서 살아 돌아온 청년들이 모인 복잡한 집단이었기에 이를 통제하고 감시하는 조직에 경험 많고 욕심 많은 인력을 투입하여 군내 불순세력을 제거하는 것을 넘어 노선이나 생..

역사이야기 2024.03.20

전쟁기념관 전시물의 고증 오류

간혹 30~40여년전의 기록이나 남아 있는 인쇄물 영화관련 자료, 행사자료를 구하려면 사라지고 없다. 그렇다 보니 70년전의 자료는 더 구하기 어렵다. 아마 미국이나 일본에 더 많은 이들이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끔 전쟁 기념관을 가보면 다양한 전시물 그리고 변화를 주는 노력에 고맙다는 생각이 들고 더군다나 무료입장이라게 고맙고 머리속에 다양한 사실이 안 들어올 때 지나가다 들린다. 그러나 자세히 다가가 모면 오류가 있고 성의가 부족함을 느낀다. 전쟁기념관에 채용이 되려면 실력도 좋아야 하고 외국어도 잘해야 하고 전문지식 또한 높아야 한다. 이곳만 그렇지 않다. 독립기념관의 경우도 그렇고 우리나라에서 난다 긴다 하는 실력자들이 모인 곳이며 단순히 전시만 하는 곳이 아니고 간행물 부터 자료를 만..

군대이야기 2024.03.19

고 김동석 대령 특별전

가수 진미령은 진씨가 아니다. 화교로 알려져 있었으나 잘못된 소문이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첩보부대 HID를 이끌었던 인물이고 육사8기 출신(지청천 장군의 추천으로 입교)이며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 아닌 국민당군 소령 출신이었고 월남하여 김 구 선생 경호원을 지냈다. 그리고 전쟁초기 중대장으로 근무했고 후에 첩보부대를 지휘 전후방을 넘어 적진 깊숙히 부대원들을 보내 작전을 수행한다. 그의 친구중에는 춘천대첩 당시 6사단 16포병대대 군수장교였지만 다른 장교들을 대신 작전을 수행 북한군의 초기 공세를 꺾은 김운한 중위(훗날 장군이 된다.)가 있었다. 이 김운한 장군은 독립운동을 했던 분(감옥에서 김동석 대령을 만난다.)이고 경북 영주가 고향이다 어제가 고 김운한 장군의 기일이었다고 한다. ..

군대이야기 2024.03.17

국사 교육이 좌편향 되었다는 사람들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국사는 대부분 90년대를 기준으로 국정교과서였다. 특히 뒷부분은 학기말에 이루어 지고 과거 반공도덕 같은 과목이나 윤리와도 관련이 있어 공통부분도 많지만 서로 간섭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리고 도덕교과의 경우 2000년대 전 후 통일정책에 대한 자세한 부분을 다뤘고 이는 과거 정부 부터의 일관된 정책에 의하여 교육된 것이다. 박정희 정부의 7.4 남북 공동성명 부터 80~ 90년대 전두환 노태우 정부의 통일정책 그리고 동유럽체제의 변화 구소련의 해체등 다양한 사건으로 인해 동유럽국가 즉 우리가 아는 공산국가와 수교도 하고 김영삼 정부 때는 김일성과 회담이 성사 될 뻔 했었고 그에 따라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도 바뀌고 중국에 들어가 경제활동을 하는 이들도 증가하고 기업도 진출을 한다...

역사이야기 2024.03.15

집에서 만든 도토리묵

전에 용인에 사시는 어머니 한분이 농사를 지었다며 들기름, 참기름, 도토리가루, 검은콩을 보내오셨다. 사서 먹을 수 있지만 직접 기르고 짜고 산에서 도토리를 모아 말려서 가루를 빻아 보냈는데 처음엔 미수가루인가? 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일요일 도토리가루를 물에 불리고 따로 물을 끓여 소금과 들기름 약간 참기름을 넣었다. 물에 불린 도토리 가루 반죽을 넣으니 끈끈한 느낌이 났고 거기에 물을 더 더하고 주걱으로 저어 타지 않게 하고 식히니 모양은 울퉁불퉁하지만 도토리 묵이 되었다. 양도 많아서 일주일 반찬으로 조금씩 내놓아도 좋을 것이고 밤에 심심할 때 먹어도 좋을 것 같다. 어릴 때 어머니가 만들어 이웃과 나눠 먹은 적이 있었다. 도토리는 말리는 과정이 있어야 하고 껍질도 까고 방앗간에 가져가 빻아야 하..

나의 이야기 2024.03.13

한강 인도교 폭파에 대한 것을 찾다가.

영화 건국전쟁의 상영은 그동안 잠시 잊고 있던 6.25와 이승만 정권에 대한 것을 다시 꺼내 보게 했고 자료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이사를 다닐 때 마다 무겁고 귀찮고 어떤 이들은 갖다 버리라고 했으나 버리기 아까운 것들이었다. 특히 한강 인도교 폭파에 대한 사실을 찾고자 인터넷이나 유튜브에 의존을 하지 않고 문헌이나 사진을 찾기 위해 온집을 뒤졌다. 심지어는 자칭 민족 우파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자료도 찾았다 . 아직 확인이 안된 것도 있으나 결론을 내릴 때 까지 구석구석 찾아 볼 것이고 혹시 내가 알고 있던 것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 생각을 해 보았다. 국방부와 육군본부, 유엔군 전사가 기본으로 상황을 이야기 하고 있고 그 당시 다리를 통과하거나 통과전 목격한 것을 적은 것이 있는데 공통적..

역사이야기 2024.03.12

조선이라는 이름을 쓰던 미군정

우리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 미군정을 실시했고 당시 대한민국의 명칭은 임시정부가 사용했고 그 산하의 광복군 또한 존재했으며 장교로 임관 시켰다. 그리고 대한민국 28년 이라고 써있다. 그렇다면 당시 미군정에 의해 만들어진 사관학교(지금의 육군사관학교)는 어떤 이름을 썼을까? 당시 임관하는 장교에게 수여된 영어와 국한문으로 된 졸업증서엔 조선 육상 경비대 사관학교라는 명칭을 썼다. 미군정이지만 '조선'이라는 이름을 썼다. 특히 단군기원을 쓴 것을 보면 이것이 망한 나라 조선이 아니고 그 옛날 '조선'을 의미 하는 것 같다. 자칫 북한이 쓰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나타내는 것 같지만 해방 이후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과정에서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을 놓고 갈등했었다. 국가 명칭을 놓고 정확한 의..

역사이야기 2024.03.11

교육과 문화 그리고 이승만 정권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중에는 교육을 활성화 시켜 문맹률을 낮추고 민주시민을 길러 냈다는 이야기를 한다. 일단은 맞는 부분도 있지만 그 기반을 만든 조직은 미군정과 당시 교육인사들이고 그러함에도 초등학교 교육을 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었고 지역유지들이나 학부모의 회비가 없이는 운영이 될 수 없었고 이 마저도 낼 수 없는 경우 학교를 갈 수 없었다. 정권 초기 초등교육비(초기 70%이상은 후원회비와 사친회비 였으며 완전히 사라진 건 1962년)의 비중은 높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지역 특히 군대가 주둔한 한강이북이나 후방이라도 군인들이 주둔한 지역의 주민들은 군에서 세운 공민학교의 도움을 받아 초등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어 군부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독립운동가로서 이승만이 외교론이다. 해서 나름 합리적이고 강대..

역사이야기 2024.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