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후반까지 대학생들까지 교련과목이 있었고 고등학생도 90년대까지 있다가 선택과목으로 전환되었다.
당시 교련을 담당한 교사들은 예비역 장교 출신들로 중위로 전역한 경우 학군장교출신이 대위로 전역한 경우 육군3사관학교나 보병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경우가 있었고 사립학교의 경우 교련교사를 하다가 자신의 대학때 전공을 찾아 일반교과목을 지도하는 교사로 바뀌기도 했고 90년대 후반 교련과목이 선택으로 바뀌면서 3사관학교나 보병학교 교육을 받은 교사들 중 학사학위가 없는 이들은 따로 대학에 편입을 하여 학위를 취득하여 정규과목 교사가 된 경우도 있었다.
체육교사와 교련교사는 1학년 초 부터 학교의 질서를 유지했었는데 체육교사들이 몸으로 학생들을 잡았다면 교련교사는 얼굴에 나타난 표정으로 학생들을 잡았다.
베트남을 다녀온 분들도 있었고 간혹 대간첩 작전을 경험한 분들도 있어서 눈빛과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일반인들과 다른 경우가 있었고 정훈병과 (보병장교를 하다 전환) 출신 교련선생님은 교직을 이수한 교사들 못지 않게 군사학이나 정치적인 내용의 강의를 재미있고 포괄적으로 설명한 경우도 있었다.
일주일에 몇 번씩 열병과 분열을 연습하고 애국조회니 해서 수업하기전 전교생이 행사를 했는데 개인적으로 군대생활 할 때 보다 더 많이 했던 것 같고 학교끼리 경쟁을 했던 것 같다.
입학을 하면 교복이외에 교련복을 맞추었(나의 경우는 입학할 때 교복이 폐지) 는데 당시 교복자율화 때문에 수입이 줄어든 양복점에서 교련복을 제작하여 팔았는데 원단의 질이 군복과 비슷한 것 같지만 조금 약하거나 폴리에스텔을 더 섞어서인지 재질이 달랐고 변변한 사복이 없던 학생들은 집에서도 막입고 산에 갈 때도 입고 농사지을 때 작업할 때도 입었다.
간혹 학교 표지가 단 교련복을 입고 시골집에 가거나 교회에 가서 또래들과 싸움을 하고(당시 학교간 성적차이가 있었다.) 특정학교를 무시하거나 차별하다 보니 교련복 착용으로 인해 문제도 있었다.
대량으로 막 만들어 파는 경우도 있었고 전학을 가게 되면 교련복의 무늬가 달라(자세히 보지 않아도 글자를 형상화한 무늬가 있었다.) 새것을 사기도 했지만 대학에 진학했을 땐 새로 사기 보다는 고등학교 때 입던 것을 그냥 입는 경우가 많았는데 교련수업시간에 입고 온 교련복의 종류는 다양했다.
대신 이름표에 학번을 표시학고 학교를 표시했었고 시위할 때 입고 다니거나 농활갈 때 입고 가고 군대를 가면서 교련복과는 이별을 한다.
학교의 교련교관들은 절대 교련복을 입지 말라고 했지만 따로 작업복이 없던 시절 이 교련복은 다용도로 사용되었다.
사실 이런 제복은 교련교육을 받는 학생들에게 전국적으로 같은 재질 같은 무늬의 것을 정해진 규격으로 국군의 전투복 수준으로 제작하고 무상으로 지급해야 했지만 부모가 돈을 내서 맞추거나 사입었고 품질이 제각각이었으며 요대나 버클 수통 각반등은 기준에 못미치는 제품이었고 교육당국이나 군당국에서 의의를 제기하거나 문제점을 지적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적이 없다.
또한 방학이면 숙제로 목총을 깎아서 가던 학교도 있었는데 학교에 보유한 모형소총이 부족하여 그것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냥 좋은게 좋다고 교련복 옷감 제작업체와 양복점 그리고 영세한 업체들이 경제적 이윤을 봐야 했기에 담합도 하고 품질도 제각각인 유사 군수품을 공급했고 그 수입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사회는 북한의 군조직과 예비군조직 그리고 학생군사조직에 대항하다 보니 분위기가 경직되어 있었고 청소년기를 보내는 학생들 또한 경직되는 경우가 있었고 결과물을 보여줘야 했기에 교육당국도 어려웠을 것이다.
병기본 교범 수준과 유사한 교련교과서와 고등학교에서 아침에 행하던 열병과 분열은 당시 시대가 만들어 낸 단면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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