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과 가문의 모든 것을 걸다
한일합방이 되기전 만주의 서전서숙은 폐교 되었고 이때 이상설은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의 '한흥동'에 있었다.(100여 가구가 거주:이회영의 도움으로 이상설이 만듬)
러시아 땅이 멀다고 느끼겠지만 발해와 고구려의 옛땅이었으며 동포들이 많이 살았으나 러시아가 일본에 패전한 이후로 상황이 급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합방전 이회영은 1000여 가구가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기로 구성하며 이를 비밀결사 조직이었던 신민회와 상의한다.
그러나 합방이 될 것을 알고 그의 형제 (이회영 포함 6명) 과 상의를 하여 특히 둘째인 석영은 양주부근의 100만평의 전답을 처분 했는데 당시 곡식을 6000석을 수확하던 부자였다. 이회영의 뜻에 적극 동참했다.
그 아우의 그 형이었다.
당시 명동한복판의 종택은 총독부의 의심으로 정리하지 못하고 재산을 급히 몰래 헐값으로 처분했은데 당시 모인 돈이 40만원 가량이었다고 하며 현재의 가치로 600억 정도의 가치였다고 하며 이들은 장기적인 독립운동울 결심하고 미리 알아둔 만주 '삼원보'에 터를 잡는데 당시 청나라의 권력자 '위안스카이'의 도움을 받는다.
1910년 연말 60여명의 가족들은 압록강을 건넜는데 노비문서를 불살랐지만 그의 노비들은 동행을 했고 이국땅에서의 시련은 시작이었고 많은 재산은 그들의 손에서 멀어졌지만 독립의 의지는 꺽이지 않는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