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과 가문의 모든 것을 걸다.
만주 삼원보에 터를 잡은 이회영은 장기적인 독립전쟁을 하기 위하여 신흥무관학교를 만든다.
신흥이라는 이름은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의 신을 따고 다시 일어서자는 뜻에서 흥자를 썼는데 초기 교장은 서전서숙을 이끌었던 이동녕이 맡았다.
교관은 대한제국 무관 학교에서 교관을 지낸 이들이 담당했다. 여건이 좋지 않아 여러 곳을 전전했으며 '신흥강습소'라는 말을 써서 일제의 감시를 따돌렸으나 쉽지 않았다.
그러나 학교를 운영하는데 비용이 많이 발생하여 이회영일가의 재산은 계속 줄어들고 국내에 있던 신민회의 도움을 받고 싶어 했으나 안명근의 데라우치 암살미수와 관련 105인 사건이 일어나 조직은 해체되고 그 결과 신흥학교도 운영난에 빠지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건 대단한 성과이며 이들이 있었기에 독립전쟁을 줄기차게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회영은 일본의 암살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동지들은 연해주로 보내고 자금을 마련키 위해 서울로 기차를 타고 당당하게 들어와 활동을 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지만 치밀한 언변과 증거제시로 빠져 나오게 되는데 이회영일가의 위상과 왕족과 사돈이라는 점 때문에 함부로 하지 못했다.
국내에서 지인들을 만나며 시간을 보낼쯤 연해주에 있던 절친 이상설의 부고소식은 이회영은 큰 충격을 받았고 새로운 방략으로 고종을 만주로 망명시켜 독립운동의 상징화 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렇다고 이회영이 왕정을 복고하고자 하는 복벽주의를 추구한 건 아니었다.
이회영은 지인의 도움으로 돈을 마련 고종이 거처할 건물을 북경에 마련하였고 황실과의 결혼을 이유로 고종과 접촉을 하여 탈출을 준비했으나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를 하였다.
아마 고종의 탈출계획을 눈치채고 계획적으로 살해하지 않았을까 당시 추측을 했고 자칫 문제가 커질 것을 우려 중국으로 출국을 한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