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이회영 선생 . 종편

lkjfdc 2017. 4. 14. 22:27

 

 

가문과 자신의 모든 것을 걸다.

 

어떤 한 인물에 대해 밴드에서 이렇게 길게 글을 올린건 처음일 것이다. 업적에 비해 알려진게 적은 것에 놀랐고 반대로 과거 화려한 독립운동가라고 생각했던 사람의 업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심지어는 왜곡되었다고 느꼈을 때 느끼는 감정은 유쾌하지 않다.

 

이회영은 독립운동의 기반부터 방략 그리고 실무를 조정하고 조국을 구하는 일이라면 친일파를 제외하고 누구나와 대화를 했다.

 

그가 북경에 살면서 가산을 써가며 독립운동가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도움을 주다보니 정작 본인과 가족은 생활고에 시달렸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럼에도 불가하고 동북아시아의 여러 무정부주의자들을 규합하고 이상촌을 만들고자 했으며 '다물단'이란 조직을 만들어 '김달하'란 밀정을 제거하는데 그가 유명한 김활란의 형부이다.

 

60대의 노인임에도 '재만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재만한족연합회에 참여하며 남화한인청년연맹과 흑색공포단 같은 조직도 결성한다.

 

김구의 ' 한인애국단'이 이봉창 의거 , 윤봉길 의거로 독립운동의 큰 획을 그었다면 이회영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20년대 중국과 조선 본토를 공포의 도가니로 만드는데 그들이 의열단에서 활동한 박재혁, 김익상 등이며 비록 윤봉길에게 가려졌지만 백정기등 군사훈련과 민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침체된 무장독립투쟁을 다시 일으키고자 만주 대련으로 가다가 일본에게 회유된 연충열과 조카 이규서의 밀고로 잡혀 고문을 당한 후 66세의 나이로 이국 땅에서 숨을 거둔다.

 

마지막 까지 조국의 광복을 위해 힘을 쓰던 우당 '이회영'

 

그는 우리나라의 지식인과 부유층 흔히 자신들을 '지도층'이라며 백생들을 가르치려하고 무시하고 자신의 것을 지키고자 힘이 쎈 권력에만 붙어 자신을 합리화 하려는 자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는 인물이라 생각한다.

 

우리 대한민국은 이회영과 그 가문에 큰 빚을 졌고 신세를 졌다고 이야기 했다.

 

그의 동생 이시영은 해방후 부통령을 지냈으며 신흥무관학교의 맥을 이었던 학교가 서울에 신흥대학교로 새출발을 했고 지금의 경희대학교로 발전한다.

 

그의 자손중엔 육사를 졸업하고 군생활을 하다 국회의원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이 있고 안양시 국회의원 이종걸이 그의 손자이다. 둘은 사촌간이며 우리나라 정치에도 영향을 준 사람들이다.

 

이회영의 삶은 자신보다 가정보다 무너진 가문보다 망한 조국을 구하려고 온몸을 던졌고 비극적 삶으로 끝났다고 볼 수 있지만 그와 그의 형제들 그리고 자식과 조카들이 있어 머나먼 이국땅에서 희망을 갖고 뜻을 펼칠 수 있었다.

 

오늘날 처럼 기회주의가 득세하고 힘의 흐름에 따라 욌다 갔다 하는 이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는 큰 인물이라 생각한다.

 

사진출처: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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