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과 가문의 모든 것을 걸다!
3.1운동의 파급효과는 엄청난 것이었고 해외의 독립운동 조직도 고무되기 시작했다.
분산되어 있던 조직을 통합 국제도시 상해에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서로의 생각이 다르고 출신 지역을 기반으로 파벌이 조성되어 싸웠는데 대표적인 싸움이 기호파와 서북파의 싸움이었는데 기호파는 서울 경기등에서 살던 사람들로 과거부터 권력을 쥐고있던 세력이었다.
서북파는 평안도 세력이었는데 주도권 싸움을 했고 방략을 놓고 싸웠으며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은 미국에서 귀국하여 대표가 되지만 미국에 보낸 '위임통치에 관한 내용'이 밝혀져 탄핵을 당하여 미국으로 가버렸다.
임시정부의 인사들은 장차 본국에 정부가 세워지면 권력을 잡기위한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이회영은 서로 지시하고 권력을 다투는 임시정부보다는 본부를 만들자 요구 했으나 서북파에겐 기호파로 몰리고 공화국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에겐 왕당파로 몰리게 되기도 한다.
결국 독립운동을 하기 용이하고 본국과 가까운 북경으로 이동을 하는데 당시 같이 뜻을 합친 이들이 신채호, 김창숙,김원봉등이며 사상이나 이념에 있어 이회영은 유연했고 포용적인 인물이라 누구하고도 대화를 했으며 이때 북경에 모인이들을 '북경파'라고 한다.
임시정부엔 동생 '이시영'이 남아 ' 김구'와 함께 명맥을 유지시켰다.
만주에선 당시 신흥무관학교는 폐교가 되었지만 그들을 기반으로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으며 수많은 독립군이 나오고 의열단같은 조직에서 활동을 하는데 의열단을 이끄는 이는 김원봉이었으나 그 기반을 만든이가 신채호와 이회영이었고 그들이 만든 선언이 '조선혁명선언'이며 이들은 적극적으로 몸을 던져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조상으로 받은 계급과 권위를 내려 놓고 누구와도 토론하고 걱정하며 행동으로 보여준 그의 사상을 '아나키즘' 이라하며 이를 '무정부주의'라고도 한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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