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이회영 선생.1

lkjfdc 2017. 4. 14. 22:15

 

 

자신과 가문의 모든 것을 걸다!

 

독립운동의 방략을 놓고 군사적인 것을 통해서 하자! 아니다 계몽운동은 통해서 하자! 아니 외교적인 것을 통해서 하자 ! 이것 저것 주도권과 권력 다툼하지 말고 힘을 합치자! 등 갖가지 방안과 추구하는 점이 달랐다.

 

어느것이 맞다 그르다를 떠나 적어도 독립을 하고자 모든 걸 바친 분들이 있었고 그들을 더 빛나게 하고 그들에게 힘이 되지 못했던 대다수의 기득권층과 사람들은 그들에게 힘이 못되었음을 반성해야 하고 다시는 이런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어선 안된다고 본다.

 

 

이회영! 그는 그의 집안은 구한말 대한제국의 기득권 층의 정점에 서있던 집안이었다. 그의 조상 중 대표적 인물이 백사 이항복이며 당시 이회영의 아버지는 이조판서였다.

 

일반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며 기복신앙을 추구하는 흐름과는 달리 '전덕기'라는 목회자의 베품과 사랑의 정신에 감복하여 상류층이 다니던 정동교회가 아닌 서민과 천민이 다니던 상동교회를 다니며 남궁억, 이상재, 조만식, 김규식, 이동휘, 최남선, 윤치호등을 만나 교류하고 교회내의 학교인 상동학교 학감을 맏는다.

 

 

1905년 을사조약이 일어나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치밀한 계획을 세워 을사오적을 암살하려고 모의하였지만 실패했고 고종에게 위임장을 받아 이상설 (의정부 참찬 출신), 이준 (법률전문가), 이위종 (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아들 외교전문가) 세사람을 헤이그에 보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준은 병으로 이국땅에 묻히고 남은 사람들은 을사조약이 무효라는 것을 만방에 알린다.

 

특히 이상설의 경우 차후 못돌아 올 것을 감안하여 만주에 '서전서숙(서전평야의 이름을 땀)'이란 학교를 만들어 학생들을 지도하게 한다.

 

그리고 헤이그 특사 사건이 실패하자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를 만드는 데 신민회는 공화정을 추구하였으며 회장은 안창호였고 이에 영향을 받아 학교가 만들어 지는데 그 학교가 평양의 대성학교와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였다. 그러나 안명근 '데라우치 암살미수 (105인 ) '사건이 터져 조직이 해산된다.

 

헤이그에 특사를 보낸것이 알려져 고종은 퇴위를 하고(1907년) 세명의 특사에겐 결석재판을 열어 특사단 정사였던 이상설에겐 사형 선고가 이준과 이위종에겐 종신형이 선언되었다. 이준은 고인이 된 상태였고 이상설과 이위종은 망명을 하게 된다.

 

 

그리고 군대가 해산되고 경찰도 해산되고 1910년 대한제국은 이 땅에서 사라진다.

 

한일합방 당시 '조선귀족령'이 발표되어 합방에 공로가 있던 귀족들에게 작위를 내리고 76명에 달하는 지배층에게 돈을 주는데 당시 이완용에겐 15만원 당시 퇴직금이 1500원...

 

76명 중 돈과 혜택을 거부한 이는 단 8명이었다고 한다. 뒤늦게 밝혀진 사람이 12명이었다고 한다.

 

또한 각 지방 양반과 유생에겐 1500만원의 돈이 주워 졌는데 대부분은 받아 챙기고 스스로 일본의 신하가 되었다고 한다.

 

남보다 더 많이 누리고 더 많이 배운 이들에게 더 많이 베풀라는 말을 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당시의 지도층이라는 양반들은 앞장서서 저항하기 보다는 가문과 자신의 안위를 위해 총한방 안쏴보고 나라가 망할 때 돈벼락을 맞고 만세를 불렀다.

 

참고:이회영 내 것을 모두 버려 모두를 구하다. 봄나무 사람책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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