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이후 제헌국회 국회의원을 뽑을 때 만들어진 선거구이다.
지금과 다른 이름을 볼 수 있고 당시의 인구규모에 따른 선거구의 구분을 일 수 있다.
서울의 선거구가 11개, 부산이 4개, 대구가 3개 이며 춘천을 둘러싼 춘성, 청주를 둘러싼 청원, 진주를 둘러싼 진양이 눈에 뜨이고 이러한 이름들은 시간이 흘러 강원도의 지지체의 경우 원주를 둘러싼 곳이 원성, 천안을 둘러 싼 곳이 천원, 충주를 둘러싼 곳이 중원, 제천을 둘러싼 곳이 제원등으로 불리다가 현재는 통합이 되었다.
강원도 였던 울진은 경북에 편입이 되었는데 상당한 면적을 자랑하며 전북이었던 금산은 충남이 된다.
38이남이었던 황해도의 옹진이나 연백은 인구가 많았는지 선거구가 갑과 을로 나뉘어 있고 개성, 개풍, 장단의 경우 면적은 좁지만 선거구가 3곳이다. 이곳의 주민들은 6.25동란 이후 아래의 섬이나 서울 인천, 경기도 지역에 정착을 한다.
강원도 38이북이던 철원, 화천, 인제, 양구, 양양, 고성등은 아예 이름이 없는데 6.25 이후 수복을 한다.
홍천의 경우 육지의 면적으로는 당시 가장 넓은 군이라고 하는데 서쪽과 동쪽의 문화와 언어에서 차이가 있다
지금은 인구 소멸지역이 되고 있는 합천(당시엔 협천으로 부름), 이나 의성은 인구가 많아 선거구를 나눴던 것 같고 전라도의 해남, 고흥, 나주, 고창군, 완주,익산, 정읍 또한 인구가 많았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호남과 나주 평야지역에서 농사를 짓는 인구가 많았던 것 같고 38선 부근의 옹진, 연백, 개성부근도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무안군의 경우는 전남 서해안의 섬을 아우른 지역인데 이곳에서 신안(새로운 무안)군이 탄생한다.
충남의 부여나 논산 선거구가 두 곳이며 이곳도 논산평야가 있어 농업인구가 많았던 것 같고 지금은 태안과 서산으로 나눠져 있지만 한 개의 군이었다.
생각보다 대전은 그리 많지 않은 인구가 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바로위 충북의 청원과 청주는 인구가 많았는지 선거구가 나뉘어 있다.
경상도 지역도 낙동강 중하류의 밀양이나 김해 형산강 부근 영일, 영천 그리고 경주, 창원의 인구가 적지 않은 것을 보면 농업인구의 비중이 높았던 것 같고 통영의 경우 거제도와 같이 묶인 기초 자치단체로 선거구를 둘로 나눈 것도 인상적이며 인구 또한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의령군도 당시엔 10여만의 군인구가 있었다고 하는데 의령군을 '선령군'으로 표기 한 것은 오탈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영덕군이 있는 자리의 함덕이란 이름(오탈자가 아닐까)도 특이하다.
동래군은 부산시가 되었고 넓은 상주의 경우 인구감소를 걱정하고 있다.
영일에서는 포항시가 생기고 선산에서는 구미가 생기고 지금의 경기도 화성은 수원이었고 안양과 안산, 과천등은 시흥군이었고 서울의 은평구 지역 북한산 부근은 고양군이었고 남서쪽은 시흥군 남동쪽은 광주군이었다.
양주는 갑에서 의정부, 동두천이 나오고 을에서는 구리가 나오고 훗날 양주와 남양주로 분리된다.
해방된 당시와 지금의 기초지자체의 권역을 알 수 있고 변한 명칭을 알 수 있는 자료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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