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전야라는 영화가 있었다.
29년만에 합법적으로 큰 극장에서 상영이 되었다고 한다.
1990년 4월 6일 부터 15일까지 전국 대도시 주로 대학가에서 상영이 되었던 영화이며 '장산곶 매'에서 제작을 했다.
장산곶이라고 하면 황해도 지금의 휴전선 근방의 지형으로 '곶'이란 표현은 반도가 일본식 표현인데 반해 우리식 표현으로 그 흔적으로 남아 있는 지명이 인천과 안산의 고잔동(곶안의 동네)과 평택의 고잔리 등이 있다.
장산곶에 사는 전설적인 매를 등장 시켰고 이 새는 당시 여러 곳의 디자인으로 등장했었다.
아무튼 장산곶매의 작품엔 광주항쟁을 알린 ' 오 꿈의 나라!' 그리고 ' 파업전야' 그리고 '오 어머니 당신의 아들' 네번째가 '닫힌 교문을 열고'등이며 대부분 작품들은 당시 금지 되었고 소송을 했으며 대부분 16mm로 35mm상업영화와는 달리 영화법의 적용을 받지 않던 것이 었지만 당시엔 압박을 받았었다.
특히 파업전야는 최초의 노동문제를 다룬 작품이었다고 하며 당시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훗날 ' 명필름'이라는 영화사로 활동을 이어갔고 영화음악을 담당했던 안치환은 메이져 무대에 진출했다.
이 영화가 상영될 당시 난 군대에 있어서 어떤 영화인 줄 몰랐고 제대 후에 ' 닫힌 교문을 열며'란 영화를 본적이 있었다.
당시 영화나 연극을 보면 자료집을 사는 것이 습관이었으나 이러한 작품의 경우엔 남아 있는 것이 잘 없고 대부분 극장보다는 연극무대 또는 대학교 강당에서 상영했고 벽보는 주로 찢겨져서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이 벽보와 표는 우연히 헌책방에 책을 사러갔다가 책갈피 사이에 살짝 끼어 있던 걸 구했다.
세월이 바뀌어 다양한 영화가 만들어지는데 그 시작이 이러한 영화의 등장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열악한 제작여건과 함께 막상 만들어도 상영을 하기 어려웠던 영화들은 시대가 지나 다시 재조명되고 무대에 오를 수 있다고 본다.
어제가 5월1일 근로자의 날이었다.
노동자라는 말 보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근로자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어찌 생각해 보면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던 건 전체주의적이고 권위적인 국가들 보다 약자를 배려하고 사회권을 보장해 주는데 힘을 기울였기 때문이라 보며 다원화된 사회가 보장해 주어야 할 3세대 인권 중에 연대권이 있음을 자각하고 인정해 준 결과라 생각한다.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광주였을까? (0) | 2019.05.18 |
---|---|
일본의 새로운 연호와 우경화 (0) | 2019.05.09 |
잊힌 우리 옛길 (0) | 2019.05.04 |
이정화의 '봄비'가 있는 LP (0) | 2019.04.23 |
4.19를 지나며 (0) | 2019.04.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