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이다.
요즘 당시의 발포명령과 시내에서 헬기사격을 한 걸 두고 사실파악과 함께 관련자들의 증언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피해자 측이 아닌 작전과 관련된 인사들의 증언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왜 하필 광주를 대상으로 강력한 군대를 출동시켰을까?
부산과 마산은 너무 크고 대구 또한 너무 크며 대전은 서울과 너무 가깝고 국토의 중앙에 있으며 목포는 작고 바다와 인접해 있다. 봉쇄가 어렵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신군부는 과거 제주도4.3사건이나 여순병란 같은 사건을 주도 면밀하게 검토했을 것이고 광주라는 지역의 비중등을 생각해서 고립시키고 작전을 진행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교통이 좋고 뭔가 뚫려 있는 현재의 광역시 광주를 생각하지만 실제 광주를 가보면 호남선은 주변의 송정리를 지나고 과거엔 행정구역상 송정리는 전남 광주시가 아니었고 광산군이라 불렀다.
기차를 타고 광주를 가는 경우 송정리에서 내려 광주시내로 들어가야 했다.
물론 광주역까지 철도가 없는 건 아니나 비중이 낮았다.
대전이나 대구처럼 큰 철도가 지나지 않는 곳이 광주였다.
물론 전북 전주도 그러한데 근본적인 건 일제의 철도부설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서쪽부분엔 영산강 지류인 황룡강,극락강이 막혀있고 동쪽엔 무등산이라는 1000m넘는 고봉이 있어 고립되어 있다.
또한 특전사 병력이 투입되기전 강안의 극락강 광주천 부근엔 만명이상을 교육하고 주둔시킨 상무대가 길목을 막고 있고 교육부대이나 교육받는 병력을 뺀 교도대(보병, 포병, 기갑,화학학교 )의 전투병력들이 있었고 예하에 한강 이남 최대의 강력한 전차나 장갑차들이 있고 출동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기갑학교에 배속된 부대가 있었다.
당시 수도권이나 전방을 빼고 전차나 장갑차같은 장비를 출동시킬 수 있는 곳은 광주밖에 없었고 간혹 부산에도 있지만 정비창에서 정비를 하던 것이기에 용도가 다르며 외부에서 출동을 할 수도 있겠지만 장거리 이동과 작전에 부담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북서쪽에 상무대 보다 장비는 적지만 향토사단인 31사단 병력들이 있었다.
더 중요한 건 이들이 미군의 통제밖 병력이었다.
특전사 또한 그렇다.
대구나 부산 대전보다 실제 군부대의 비중이 높고 대구의 2군사령부나 부산의 군수사령부, 대전의 통신학교나 교육사령부와 비교했을 때 출동시킬 병력은 비슷하겠지만 장비는 광주가 많고 바로 시가지 외곽 넓은 들에 그들이 있었다.
군부대의 다수 학생장교들 때문에 지역경제가 큰 도움을 받는 곳이 광주였고 공군기지가 시내 바로 옆에 있다.(이것도 특전사나 외부병력을 출동시키기 용이하다.)
아마 대한민국 대도시에서 가장 고립시키기 좋고 국가 산업에 영향을 입히지 않고 외부에서 접근하기도 내부에서 빠져 나오기 어려운 곳이 당시의 광주였다.
유혈진압을 할 경우에도 외곽만 봉쇄를 하면 밖으로 소문이 나갈 수 없는 땅이 광주땅이라는 이야기다.
또한 방송국의 방송과 신문까지 통제하면 광주는 고립무원 누가 어떤 짓을 했는지 잠깐동안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지금도 서울 대전 대구 부산에 비하면 덜 알려졌고 교통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곳이 광주땅이다.
또한 5.18 이야기만 나오면 혹자들은 지역이 유별나서 단합이 잘되서 다른 지역은 조용한데 왜들 그러나 하지만 시대를 거슬러 해방정국 일어났던 사건들 특히 제주나 대구에서의 유혈사태 그리고 여수와 순천에서 발생한 사건 나아가 4.19의 원인이 된 마산의 사건에서 당국의 대처가 어찌했는지 안다면 그런 말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관련자들의 증언을 청취하여 사실을 알고 귀 기울여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과 상처받은 분들을 생각하며 이런 비극이 일어나는 일이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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