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독립운동가나 민족운동가의 죽음을 보면 외세에 의해 죽기보다는 독립이후 내부의 사람들에게 살해된다.
김 구도 그랬고 여운형도 그랬고 조만식도 먼나라 인도의 간 디도 같은 나라 사람에게 살해된다.
특히 여운형 선생은 해방직전 국내에 있던 독립운동가이며 사상에서 폭넓은 시야와 유연성 그러면서도 꾸준히 외세와 싸워온 지도자였고 지덕체를 고루갖춘 이였다.
여운형선생이 YMCA야구단에서 선수를 했고 동학뿐 아니라 유교 그리고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이라는 사실 보다는 좌파지도자고 그의 딸이 북한으로 갔다는 사실만을 부각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는 좌파나 공산주의의 확산의 원인을 잘못된 정치에서 보고 이것을 바로 잡고자 노력한 지도자였다.
여운형이 한지근이라는 청년에게 암살 당하지 않았다면 김 구 선생의 입지도 달랐을 것이고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이 국회의 선택을 받지 않았을 것이고 초대대통령이 되었을까? 생각한다.
나는 우리나라의 갈등이 자본주의냐 공산주의의 이념갈등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틈바구니에서 눈치를 보고 주도권을 잡으려는 자들 때문에 생겼다고 생각하며 거기에 출신지역, 국권피탈전의 신분 그리고 편협한 종교인들의 세력 다툼 때문이라고 보며 닫힌 사상체계와 이념이 더 가세하여 동란과 함께 이승만의 실정과 쿠테타 그리고 군부독재 그리고 혼란과 함께 양극화를 심화시켰지 않았나 생각한다.
여운형선생이나 김구의 공통점은 민족독립을 위해서는 단합을 외쳤고 사상과 종교에서 꽉막힌 인사들이 아니었다.
카리스마나 권위 보다는 시야가 넓고 갈등을 줄이려는 지도자가 난 이 시대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에 가면 몽양 여운형선생의 기념관이 있다.
길이 막혀 근처에 진입하기 쉽지 않았고 신원역 앞으로 통과한 기념관에 갔으나 휴관이었다.
그러나 동네 진입로에 서있는 여운형선생의 어록은 한마디 한마디 나의 마음을 파고 들었다.
앞으로 한강이 흐르고 그 건너가 광주땅인 청탄이며 예전에 멋진 고택이 있었다고 어느 책에서 본 기억이 있고 15년전 근처 판옥선 선배의 처가가 있어 가을날 메뚜기를 잡은 적이 있다.
배산임수 마을에 조용하게 자리잡고 있는 여운형 기념관엘 다음에 시간이 나면 꼭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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