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호수가 되버린 곳에 비석으로 남아 있는 송파나루는 과거 한강의 유명한 집산지였다.
지금은 강남이지만 예전에는 이 위를 기준으로 강북이었다.
잠실은 일제가 들어올 당시에도 섬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삼전도 비가 있으며 과거 인조는 청나라 왕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했으며 왕자들 부터 전쟁을 하자고 했던 사람들 부터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삼학사 그리고 수많은 백성들이 계급에 상관없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임진왜란의 경우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보고 연패를 하기도 했지만 백성들과 관군은 끝까지 싸웠고 이 땅에서 적을 몰아냈다.
그러나 병자호란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상태로 패했고 항복을 했다는 게 충격이었다.
정권은 유지되었으나 그 굴욕은 너무나 컸다.
전쟁의 실상을 잘알고 선대왕 선조의 전철을 밟기 거부했던 광해군은 당시의 현실을 깨닫고 후금과 명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하고 임란이후 황폐해진 조선을 살리기 위해 진력했으나 서인정권에 의해 쫒겨난다.
인조와 그 주변의 인사들은 명분과 함께 의리를 강조했으나 현실은 냉혹했다.
전쟁은 많은 것을 잃게 했고 동북아의 질서는 재편되었다.
후금은 초강대국인 청이 되어 대륙을 호령했고 조선은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훗날을 도모했으나 큰 나라 청과 싸워서 원수를 갚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다만 혹자들은 문학작품이나 이야기에서 청나라를 꺽고 분함을 표현할 뿐 현실은 사후약방문이고 군비를 확장하고 북벌을 하니 수도의 방비를 강화하니 해봐야 결국은 집권세력의 쇼였고 정작 나라와 백성은 없었다.
세월이 흘렀다. 지금도 어쩌면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눈치를 봐야하고 명분이 먼저냐 실리가 먼저냐를 놓고 선택하고 결정하며 살아야 하는게 이 한반도의 현실이다.
외부의 세력들은 자신의 잇속을 챙기고 현실적인 상황판단 부터 하는데 우리는 그들보다 한박자나 반박자 느리고 눈치 보느라 급급했고 적극적이지 못했었다.
오늘 남북의 정상이 판문점에서 회담을 한다고 한다. 과거에도 회담은 있었지만 이번의 경우는 또 다르다고 본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만 대화가 진전되고 경색국면을 완화하여 동북아 질서 아니 세계질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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