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대한민국 역사 최초로 북의 정상이 남으로 와서 대통령을 만났다.
대단한 사건이 분명하며 경색된 분위기가 완화되어 좋아졌으면 한다.
남북정상의 만남은 알다시피 2000년 북한순안비행장에서 김대중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최초였고 그 후 노무현대통령도 정상회담을 했다.
당시 도덕교과서에서는 절반가량의 내용을 통일문제로 다루었으며 이승만 부터 군사정부의 통일정책과 노력등을 비교적 상세히 다뤘기에 10대 청소년이었던 지금의 30대들은 나름 북한에 대한 시각에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시대를 거슬러 남북의 본격적 만남은 70년대 초반이 아닐까?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그 유명해던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일본군 경력을 짧으나 국군의 입대시기로 보면 박정희 보다 빨랐음)은 주석궁에서 김일성을 만난다.
당시 북은 주변 강대국인 중국과 소련을 남은 태평양 건너에 있지만 병력을 동아시아에 주둔 시키고 있는 미국을 믿지 못했으며 닉슨독트린의 영향은 박정희나 김일성에게 체제 불안을 안겨주었고 둘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대화를 하고자 노력했고 남측에서 보낸 실무자이자 실세가 이후락이었다.
이후락은 원래 일본육군항공병으로 입대를 했었으나 해방을 맞았고 나름 배운 사람으로 해방후 군사영어학교에 입교 국방경비대의 주축이 되었고 진급도 빨랐다.
또한 정보계통에서 실력을 발휘했다.
당시 그와 관련된 문서중 항공기에 관한 정보문서가 있는 걸 보면 치밀하고 학구적인 면이 강했던 인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일성을 만나러 가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청산가리를 준비했다는 그는 공작정치의 상징으로 김종필이나 김형욱 등과 함께 철권통치의 기반과 함께 외교관계를 조율했던 실세였으나 1인자 였던 박정희 앞에선 늘 불안했던 인사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대한민국 군대의 후임이지만 나이가 많고 일본군과 만군의 경력이 길었던 박정희가 권력을 잡자 그의 손과 발이 되었고 정보기관의 수장이 되었으나 신군부에 의해 물러나고 말년은 쓸쓸했다.
그도 박정희정권 시절 남한과 북한의 경색국면을 해결하고 한반도의 안정을 위한 노력을 해왔으며 이런 흐름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고 본다.
만약 남북정상회담이 이명박 정권이나 박근혜 정권시절 이루워 졌다면 어떠했을까? 생각을 하며 남북관계의 개선을 위해서라면 좌와 우도 보수와 진보의 가치보다도 민족의 번영과 평화를 위해 반드시 대화와 협력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며 지금의 기회를 잘 이용하여 훗날 자랑스러운 사례로 남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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