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하면 사람들은 5.18을 생각하는데 학생시절 광주를 간적이 있었고 30대 초반 방문한적이 있었다.
학생시절엔 조선대의 길다란 본관 건물을 본적이 있었다.
상당히 길며 학교의 대부분 시설이 있을 것 같았다.
아마 대한민국 학교 건물의 본관 중 조선대 본관이 가장 긴 것 같다.
또한 이 학교는 동란 이후 학교를 그만 두었던 학생장교들이 상무대에서 교육을 받거나 근무하며 학위를 받은 고등교육기관이라 타지역에서 광주에 왔다가 공부한 장교들 중 조선대에서 대학공부를 한 사람들이 종종있었고 비슷한 이유로 부산의 동아대에도 부산 경남에서 근무하던 장교들이 학위를 받았다.
당시 대학교 운동장은 인근 학교와 같이 쓰는지 정비되지 않았지만 무척 넓었다.
학교 앞에는 철도가 지나고 있었고 훗날 영화에서도 본 것 같다.
그리고 전남대를 가 보았는 데 다른 지역 국립대와 마찬가지로 학교가 넓었고 시설이 좋았으며 용봉동이라는 동네가 인상적이었다.
또한 5.18의 상징인 전남도청 앞도 가 보았다.
그리고 지금은 나라에서 관리하는 국립묘지인 망월동 묘지와 길은 허름했었다.
정부는 유가족들에게 이장을 요구했고 유족들은 돌아가며 당시 묘지를 지켜나갔다.
그후 또한 광주를 갔었다. 스스로 간 것이 아니었고 군대에 입대한 후 훈련소를 퇴소한 후 후반기 교육을 받으러 당시 상무대 당시 정식 명칭은 육군전투병과학교라고 했고 예하엔 보병,포병,기갑,화학학부라는 별도의 학부가 존재했었고 내가 퇴소한 후 과거처럼 학교체제로 복원되었다.
극락강변 일본군이 주둔하던 곳에 터를 잡고 해방 이후 국군이 주둔하다가 6.25이후 전투가 지금의 휴전선에서 소강상태에 이르자 전투병과 장교와 부사관 특기병을 교육시키는 공간으로 변화시켰다. 그 시설들은 논산훈련소 규모에 못지 않았고 주변의 공군비행장을 제외하고 장비나 주변 훈련장의 규모는 신병훈련소가 밀집된 논산을 능가할 수 있다고 본다.
때문에 이 지역에 수용된 교육인원(주로 장교와 부사관이 교육생이다 보니 영향력이 컸다.)들이 광주에 미친 경제적 파급효과 또한 논산이나 다른 군사도시 못지 않았지만 대부분 논산이나 원주 의정부는 알아도 광주의 군사기능은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이야 상무대가 인근 장성으로 갔지만 당시 이전이 예정되어 있었고 왠만한 대학 여러개가 들어갈 만한 장소였고 더 외곽 광산구와 나주의 접경엔 한강이남 최대의 제병협동훈련장이 있어 밤낮으로 병력들이 기동을 하고 위험요소도 있었지만 늘 훈련으로 들썩이던 곳이 광주의 서부 지역이었다.
심지어는 어등산이라는 조선문학에도 나오는 송정리 인근의 야산에는 포병사격장의 탄착지로 벌겋게 벗겨져 흉물스러웠다.
그러나 이러한 훈련장을 이전하거나 폐쇄하는데 시간이 걸렸고 훗날 전투병과학교가 떠난 넓은 공간엔 대전의 둔산지구처럼 신도시가 들어와 시대가 변했음을 실감했다.
아무튼 광주가 군사적 기능을 담당했음을 아는 이들은 군을 다녀온 장교나 직업군인들 그리고 인근지역의 주민들일 것이다.
상대적으로 경상도 대구 부산권역이나 충청권역에 비해 외부의 방문자가 적다 보니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또다른 원인에는 군과 민간인의 충돌로 벌어진 5.18 때문에 이런 부분은 부정적인 부분으로 인식되지 않았나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옛날 군장교들은 정식 명칭인 육군보병학교라고 부르기 보다는 광주보병학교 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을 만큼 광주지역 이미지가 강했었다.
마치 육군훈련소를 논산훈련소라고 하듯...
그리고 5.18당시엔 광주의 31사단과 전교사 (상무대)예하의 각학교의 교도대와 9전차대대등이 작전에 참여 했었다.
이들 병력의 수는 예나 지금이나 적었고 실제 작전에 많이 투입된 병력들은 특전사 예하의 공수여단과 양평에 있던 20사단이 출동하면서 큰 사건으로 확대되었다고 판단한다.
중요한 건 수많은 군인들이 교육을 받는 도시에서 국민을 두려워 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밤새 광주시 외곽에서 학생장교들과 교도대 병력들이 훈련시 쏴대는 포탄의 파열음 보다 더 위협적으로 느껴지는게 시가지 쪽에서 들리는 것이 5월 행사의 웅성거림이었다.
연일 행사와 집회가 있는지 들려오는 사회자의 떨리는 목소리가 귀를 두드렸고 군부대 담을 넘어 들릴 때의 느낌은 결코 편안하지 않았다.
당시 군인들은 교육중이었지만 기간병들은 충정훈련과 함께 여러 대응과정을 마련하고 있던 것 같다.
군이 국민을 두려워하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한줌의 정치 군인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본다.
그들의 명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한 말단의 병졸들 또한 그 피해자이며 그들에게도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북한 특수부대의 개입이 있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이 안되는 것이 광주라는 도시의 특징이 군사 교육기관이 몰려 있기도 하지만(실제 현역전투부대가 아님) 즉시 전환할 수 있는 군사적 기반이나 복잡 다양한 무기체계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군당국이나 정보기관은 경계를 했을 것이고 당시 광주시민들이나 전남도민들에게 발각되지 않고 침투한다는 건 불가능했다고 보며 전라도 해안 또한 해군과 육군의 병력들이 손놓고 있지는 않았으며 당시는 계엄상태였다.
또한 전두환도 북한 특수부대의 개입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5.18의 진실이 객관적으로 밝혀지길 원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군사도시의 비중이 높았던 광주의 모습도 다시 재조명되었으면 하고 광주시민들이 군인들과 하나가 되어 살아온 역사를 되살려 군인도 시민도 서로의 한을 풀었으면 한다.
비록 일본군이 만든 터에 군부대를 조성하고 전투병과 교육의 기반을 다진 공간이지만 신생 대한민국의 군사적 토대를 만든 소중한 공간이었고 그 역사 또한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군인들이 떳떳하게 특히 고위급 장교들이
군복을 입고 광주시내를 활보하고 다녀도 절대로 어색하지 않은 날들을 생각해 본다.
그들이 군에서는 어른일지 모르나 시민들 앞에서는 아직도 젊고 믿음직한 국민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광주는 당시 조용한 곳 같지만 한강이남에서 가장 많은 기계화장비와 화포 전차등이 있는 군사교육기관과 훈련장이 있었고 (휴전선 근방과 비교하면 적지만) 지금은 인근 장성으로 대부분 시설이 이동했으며 각종 장비를 운용하는 병력들 실력은 전군 최고이다.
지금 어등산은 시민공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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