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국사를 배우며 사고의 확장을 갖기도 하지만 오히려 고정관념을 갖기도 하고 편견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조선후기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갔을때와 수신사가 일본에 갔을 때의 차이를 이야기 하며 우리가 일본에 비해서 발달된 문화를 갖고 있을 것이라 생각을 했었다.
물론 일부는 맞지만 조선전기 통신사로 갔던 이 예 라는 외교관이 일본을 다녀온 후 조정에 보고한 내용을 보면 당시 일본은 우리가 생각하듯 미개하고 천박한 나라가 아닌 나름 경제가 발달하고 무기체계가 발달되어 이에 대한 것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했으나 정작 정치를 하는 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다지고 지키는데 노력을 할 뿐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경제체제와 운송체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우리의 과학기술이 발달한 조선초기라는데 더 의문을 갖게 된다.
당시 일본은 화폐사용이 활발했고 정부는 광산을 민간에 맞겨 세입을 증대시키고 국부를 키우는데 진력했다고 하며 이런 것을 사절단이 보고와서 건의했지만 크게 반영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또한 대마도에도 있던 중국제 화통완구등을 도입 전력을 강화한적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소나무로 만든 우리의 배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건조기간이 짧고 빠르다 보니 부실했고 배의 수명이 짧았다고 한다.
그리고 20~30년 가량 쓰는 강남이나 유구 일본의 배보다 내구성이 약하며 쇠못을 쓰지 않아 단단하지도 정밀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보면서 이런 것들을 현실에 반영하지 못한 것이 당시의 한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또한 상거래를 하는데 있어 말끔한 일본의 상가가 개화기 때 비롯된 것이 아닌 상당히 빠른 시기 시도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제조과정이 부실하고 물건을 진열하는 방식은 여전히 진흙바닦에 올려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데 반해 일본은 지금의 디스플레이 개념이 예전에도 있었고 훗날 나오는 조총의 제조공정이 단계화 되고 같은 제품의 대량생산 체계도 만들어져 견고하고 치밀한 부분이 있었다.
결국은 상인들이 무사들의 권력을 가져오며 근대화에도 성공하고 그 희생은 이웃인 우리가 지게된다.
중농억상의 조선이 소박하고 환경친화적인 부분도 있으나 그 체계가 왕족과 양반특권층을 위한 것이 었기에 발전이 더디고 훗날 전쟁을 크게 겪고도 정신을 못차린 것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지금도 크게 바뀌지 않은 적당주의와 대충대충 그리고 대의를 위해서 뭉치기 보다는 분열하고 좁은 시각에서 남을 평가하고 있는게 아닌지 묻고 싶다.
외국의 장점을 보고 정책과 제도에 영향을 주려한 조선 전기 외교관인 '이 예'선생같은 시야와 능력을 가진 사람이 오늘날 또한 필요하지 않은가 묻고 싶다.
참조: 문화관광부 편 2005년 이달의 문화인물 ' 이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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