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휴대폰이 일상화 되어 약속을 정하기도 좋고 컴퓨터를 한대 장착하고 다니는 것 과 같아 실시간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80년대 중후반까지 면단위 시골엔 자석식 전화기 (TA-1)가 있었고 우체국 한 쪽 구석엔 전화교환원이 전화교환대의 코드를 연결하여 원하는 지역을 연결해주고 장거리 전화는 미리 신청해야 통화가 가능했고 이장집엔 비상용 전화가 있어 유사시 사용할 수 있었다.
도시는 다이얼 전화기가 있어 다이얼을 돌려 신호를 보내고 서울에서 가령 청주나 충주에 전화를 연결하려면 이것도 미리 신청을 하는데 발음을 잘못 알아들어서 청주에 연결할 것을 충주에 연결할 수 있기에 충주의 상징인 비료공장을 언급하면 연결이 용이했다.
그러다 DDD전화체계가 완비되면서 공중전화기로 장거리 전화가 가능해졌고 전화하기 전 동전을 여러개 준비하여 전화를 했었다.
특히 군대를 가서 외출을 할 땐 전화기로 달려가 안부를 물었는데 돈이 없어 수신자 부담으로 신청을 하기도 했고 부대근처 단골 상점의 주인장에게 돈을 융통하여 전화를 했었다.
80년대 말 가수 김혜림의 노래 DDD 와 O15B의 객원가수 윤종신의 노래 '텅빈거리에서...'란 노래의 동전두개라는 단어에서 공중전화를 통한 메시지 전달의 애환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사회는 버튼식으로 전화를 하고 변화하고 있을 때였지만 말단 제대에서 상황병으로 근무하던 난 좋지도 않은 목소리로 전화교환대에 앉아 밤을 꼬박 새웠었다.
외부에 전화를 연결하고 인근부대의 통신이 원할하지 않으면 연결도 해주고 계급의 힘이 약해 연결이 안되면 불법인줄 알면서도 성대모사로 계급을 사칭 번호를 요청하면 연결이 원할해지는 경우도 있었고 전화를 잘못 연결하여 옛날 교환원 아가씨들 꾸중 듣듯이 혼줄이 난적도 있었다.
남자끼리 통하는 목소리지만 오래 통화하다 보면 신상을 알게 되고 직접 만났을 경우 담배를 나눠피울 정감이 있었다.
사회보다 낙후된 자석식 전화기였지만 유사시 가장 신뢰할 수 있었던 통신시스템이었던 것 같고 지금도 비상체제가 되면 쓸 수 있는 기기지만 다시 사용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왜냐 하면 지금의 익숙함이 좋고 과거로 돌려 생활하기에 나의 몸과 정신은 너무나 멀리 와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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