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70년전 제주 4.3사건

lkjfdc 2018. 4. 3. 08:51

 

 

 

 

 

과거 시골에서는 외부사람의 출입이 바로 알려지며 어떤 곳에서는 의심스러운 사람인 경우 경찰에 신고가 바로 들어 갔다.

 

또한 섬에 간 여행작가는 큰 사진기를 들고 산이나 들로 나가 사진을 찍다가 동네사람의 신고로 경찰이 조사를 하고 외부에서 오는 사람에게 가급적 월세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

 

삼촌이라고 이웃 할머니나 아주머니들을 부르던 독특한 어투의 섬... 제주도.

 

이곳은 대한민국의 여느 지역보다 더 외부인에 대한 경계가 심했던 지역이다.

 

일본에 먹고 살기 위해 갔다가 해방이 되어 섬에 돌아 왔으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고 외부에서 투입된 무장세력 에 의해 빨갱이의 섬으로 낙인 찍혀 폭력사건이 일어나다 다시 일본으로 도망가 재일교포 중 지역 대비 비율이 많은 지역 이들은 고향에 돈을 보내고 지금의 제주도를 만든다.

 

원래 여자가 많은 도서지만 70년전 사건은 성비의 균형을 완전 깨버렸다.

 

당시 국군도 투입이 되어 산사람이 된 사람들과 협상을 하고 평화적 분위기로 가는가 싶었지만 지역을 담당하던 김익렬 중령은 경찰 총수였던 조병옥과 충돌했고 육지로 돌아갔으며 후임자 였던 연대장은 부하에게 암살당하며 그 다음으로 온 최경록은 잠잘 때 개를 곁에 둔다.

 

물론 제주의 싸움엔 좌와 우의 싸움이 있었다.어디 제주 뿐이랴! 그러나 그 갈등의 끝은 너무나 참혹했고 이 지역의 주민들은 그 후 외부인을 의심했고 전쟁이 발발하자 특별한 ? 군대인 해병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입대하고 여기엔 젊은 여자들도 있었다.

 

살아남고 의심 받지 않으려면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는 걸 보여 주어야 했다.

 

또한 이곳으로 군대를 출동시키던 과정에서 여수순천에서는 반란사건이 나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지역민이 죽고 국군은 대대적인 숙군작업과 좌익색출 그리고 미군이 지원하던 국군에 대한 전력보강은 이루워지지 않았고 군은 체계적인 훈련보다 산으로 올라가 산사람이 된 군인들과 북에서 내려온 유격대와 전쟁을 하느라 피로했고 지쳐갔다.

 

해방 이후 갈등의 불씨 아니 그 원인의 해결에 있어 대화나 협상은 없었고 극단으로 치닫고 그 사이에 끼인 양민들은 무수히 살해 당하고 의심을 받았다.

 

그런 날이 70년이 지났고 이제 아물 때도 되었지만 여전히 그 고통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제주에 가려져 있고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이념이나 외부사람들에 대한 배타적 감정싸움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해방정국을 원만하게 해결못한 미군정과 그 사이 살아남기 위해 친일에서 친미로 돌아선 자들 그리고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의 원한을 섬사람들에게 퍼부었고 결과는 너무도 참혹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싸움보다 대화가 왜 중요하고 양극단으로 흘렀던 당시의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완화시키려고 했던 사람들이 왜 필요한지 알게 된다.

 

 

지금도 대화보다 싸움을 부추기고 갈등의 원인을 나보다 남에게 돌리고 긴장의 분위기에서 자신의 원죄를 감추고 회피하려는 자들이 있지 않은지 묻고 싶다.

 

이제는 화원상생하고 보다 나은 세상으로 나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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