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해방이후 조선 국방경비대 해안경비대 그리고 국군이 형성될 때 이남출신으로 대부분 구성된 것 처럼 생각한다.
당시 남한의 농촌 청년들은 모병제인 국군에 지원을 했지만 인구에 비례해 많은 수가 아니었다.
지원을 해도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청년) 사람이 해당되었고 일제 강점기 전쟁이 극에 달했을 때도 젊은 청년들을 모조리 병력으로 만들 수 없었다.
때문에 해방이후 장교와 병들을 확보하기 위해 관계자들(미군정이지만 실무자는 우리나라 사람)은 지원자를 모집하기 위해 각 지역을 돌았고 일제 때 부터 경찰의 힘이나 인기가 강했으며 경비대는 경찰을 예비하는 후순위 였다.
가끔은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이나 경찰과의 싸움으로 군대를 도피처로 택했으며 지역마다 따로 모집하여 지역 경비대에서 훈련을 시켜 병들은 임용을 했다.
특히 48년 8월 전후 육군의 각 병과가 만들어져 교육받은 청년들이 필요했지만 여기에 투입할 인원이 없자 남쪽으로 내려온 이북출신 청년들이 입대를 하는데 여기엔 서북청년단 청년들이 들어오고 이남에서 생업이 변변치 않은 청년들도 입대한다.
장교들 중에도 이북에서 사회활동을 하다 월남한 이들이 군사경력을 인정받고 경비대 장교가 되거나 늦은 나이 사관학교에 입교 교육 이후 장교로 임관되는데 이들은 진급도 빨라 군의 요직을 차지한다.
정일권, 김백일,장은산,백선엽,강문봉 같은 만주군 출신도 있었지만 학병출신 교사출신도 있었는데 장도영 그리고 백인엽이나 채명신, 박정인, 이대용같은 이들은 전쟁을 치루며 두각을 나타낸다.
전쟁은 이들의 입지를 강화시키기도 했지만 휴전이 된 이후 고향땅을 밟을 수 없었고 결국 남한에서 입지를 다지고 나이에 비해 계급도 높았 영남출신 장교들을 중심으로 한 이남출신 군벌들에게 5.16을 기준으로 밀려난다.
이후 군요직을 경험하고 정치인이 되기도 하지만 분단이 고착화 된 이후 대한민국에 정착을 하고 다른 실향민들 처럼 살아간다.
북한 인민군에 이남출신들이 있긴 했지만 대한민국 국군의 건군과 확장처럼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남침 이후 북한은 인민군에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이남의 청년들을 입대시켰고 이들 또한 전쟁 중 희생 되고 포로로 잡히고 협상과정에서 석방이 되기도 했지만 북으로 가서 살다가 그곳에 묻힌다.
군의 요직을 지낸 이들도 있었지만 전쟁에 힙쓸려 어느 땅에 묻혀있는지 모르고 유해조차 찾지 못한 경우도 많다.
휴전이후 분단이 고착화 되면서 남과 북의 방문과 교류가 단절되면서 고향은 갈 수 없었고 이들은 남쪽에 뼈를 묻거나 이국으로 떠난다.
북의 군요직을 차지했던 이남 출신 인사중에도 북에 뼈를 묻거나 이국 땅에서 살다 생을 마친 이들이 있으며 이들에게도 분단은 삶의 전환이었으며 기회일 수도 있었고 비극으로 끝난 경우가 있었다.
현충일...
전쟁과 분단으로 희생된 분들과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된 분들을 위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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