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면서 해방이 되었다.
당시 소련군은 미군보다 일찍 북한을 점령 했고 남쪽의 정치인 중 여운형은 일본의 패망에 대비하여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당시 총독부와 협의를 하고 일본인들과의 관계가 파국이나 폭력으로 가지 않기 위해 조치하려 했다.
그러나 맥아더가 일본에 주둔하면서 남한까지 관리함을 선포하고 점령군임을 분명히 했다.
군정을 실시하기 위해 미군은 하지 중장을 대표로 보내고 그 아래 미군 2개의 사단이 들어오며 북에는 12개의 소련군 사단이 들어온다.
당시 2개의 사단으로 남한을 점령하고 관리 하는데 무리가 따르자 미군을 보조하는 경찰을 활성화 하는데 자신들의 목적을 실현하고 당시 복잡한 정국을 내다볼 수 있는 인물을 임명하는데 그가 바로 '유석 조병옥'으로 미군들에겐 '닥터 조'로 통했다.
조병옥은 당시 보수세력이라고 말하는 한민당에서 요직을 감당했으나 경무부장이 되면서 평당원이 된다.
그리고 국군은 없었으나 사설 군사단체가 많아 미군은 골치 아파 했으며 부족한 치안인력을 보조하는 경찰예비대를 만들려고 했지만 당시 일제시대 당시 경찰을 했던 이들을 보조한다는 것에 대한 불명예와 함께 아래 조직이라는 생각으로 군대의 편성은 늦어지며 국방경비대의 지휘부를 만들기 위해 만든 군사영어학교가 만들어 지면서 전직 일본군, 만주군출신들이 입교를 한다.
당시 미군의 수뇌부는 한국에 대해 잘몰랐다고 하지만 고급장교와 초급장교를 실무진을 꾸린 미군정은 총독부가 하던 업무를 인수하고 감독하며 새로운 정부가 만들어 질 때까지 근무를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뜻을 이해하고 한반도 정책을 수행할 인물들을 찾는다.
생각보다 이들은 정치인들의 면면을 파악하는데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았으며 특히 사령관 '하지'는 이승만이 미 본토의 실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을 불편해 했고 전반적으로 미군수뇌들은 당시 우리나라 정치인들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다.
정치인들이 이기적이며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인물이 별로 없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그나마 이타적이고 적극적인 인물이 '김규식' 선생이었고 여운형을 순위에 놓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사령관 '하지'는 한쪽으로 치우치고 자신을 무시하는 인물 보다는 좌우합작을 하고 신탁통치안을 받아들이는 인물을 좋아했던 것 같다.
김규식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여했고 임시정부 초대 외무부장 부주석을 했고 해방이후에도 좌우합작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했으며 남한만의 총선거에 불참했다.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주장하던 우익인사였으며 김구와는 신탁통치에 대한 방향은 달랐으나 분단을 막기 위해 함께 북한으로 가서 회담을 한다.
그러나 뜻은 이루워 지지 않았고 정치계에서 은퇴했으나 6.25때 납북 사망한다.
세월이 흘러 우리나라의 국력도 강해졌고 국민의 의식도 다양해지고 문화수준도 높아졌다고 한다.
정치인들도 사람이기에 사익에 몰두하고 자신의 명예와 입지를 움직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해방전후 자신이 추구하는 정치노선과 방향으로 인해 사람들을 가르고 서로 욕하고 외세는 이런 점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정책을 실현하고자 했다.
해방후 남한의 화합을 하고자 했고 끝까지 대화를 하려고 했던 인사들은 하나둘 살해 당하고 전쟁 당시 사라졌다.
예나 지금이나 힘쎈 쪽에 붙어야 잘 사는 건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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