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가 일어난지 70여년이 지났다.
북한의 기습남침이 새벽에 있었고 대한민국은 휴일아침 군을 믿었으나 군수뇌부는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다.
지휘권을 위임받은 지휘관들과 장교들은 자신의 부대를 파악하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그전에 국지도발로 서로간의 총격전과 포격전이 있었고 전방의 상황을 상부에 보고 했으나 그에 따른 확실한 대비가 없었다.
오히려 전후방각지의 병기와 차량이 부평의 병기창에 입고되고 실무를 담당한 장교나 병력들이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보수교육을 받고 있는 경우도 있었고 육군본부에서는 술파티가 있었다.
수도권 부대의 경우 동두천 전방의 7사단이 대규모 공격에 마비가 되고 1사단 또한 개성을 내어주고 교량을 절단하고 철수하고자 했지만 쉽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춘천이나 강릉의 경우엔 그나마 병력들이 대비를 하고 있었고 옹진의 경우는 고립된 지역이었으나 분전하고 있었다.
충청지역의 2사단 경상도의 3사단 전라도의 5사단 그리고 서울을 지키던 수도사단을 전방으로 올려 보내고 심지어는 임관도 하지 않은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대규모 기계화 부대가 들어오는 전방에 배치하고 시흥의 보병학교 생도들을 김포쪽에 배치하는 상황은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했는지 알 수 있다.
정부는 국회를 소집하고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했지만 이승만 대통령부터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피신하고 상당수 서울시민들은 허위방송에 속아 서울에 남았다가 큰 곤혹을 치르며 훗날 '도강파'니 '비도강파'니 해서 또 다른 고통을 받게 된다.
북한은 남쪽으로 내려가면 시민들이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것이라는 남노당의 조언을 믿었으나 대규모 격전과 사상자가 발생한 당시 상황에서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고 결국 자신들의 입지 뿐 아니라 김일성의 권력만 강화시키는 원인을 제공한다.
정부수립전 부터 정규군을 만든 북한과 정부수립전 경찰 예비대 수준의 국방경비대를 편성한 대한민국은 애초에 북한이 준비하고 처들어 온 대규모 접전의 상대가 안되었고 미군 또한 일본이나 미본토에서 북한의 공격에 안일한 대처를 했던 것 같다.
특히 미 지상군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대규모 축소와 함께 수많은 군인들을 제대하게 하고 많은 장비를 도태시키거나 축소한 상태에서 다시 전력을 강화하여 한국으로 투입하는데 시간을 보내게 된다.
급한조치로 일본의 군수산업이 다시 일어나고 그와 관련된 산업과 유휴인력이 재취업하고 경제활동을 하면서 망해가던 나라는 다시 살아난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될 수 있음을 국제사회에서 볼 수 있는데 바로 6.25와 베트남전쟁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도 한반도에 과거와 같이 끔찍한 상황이 벌어져 과거와 같은 일이 되풀이 될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며 진정한 강자는 싸움을 하는 것 보다 사전에 적국의 의지력을 꺽게 하거나 화해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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