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비극의 상징 인제 오마치 고개

lkjfdc 2019. 1. 6. 08:00

 

 

 

 

 

 

 

 

 

 

고개에는 령이나 치 또는 재라는 명칭이 붙는다.

 

 

강원도엔 도경계나 군경계가 아니어도 고개가 많다.

 

홍천에는 삼마치 인제엔 오마치 또는 오미재라는 고개가 있다.

 

한계령이나 진부령 또는 대관령 같은 높고 험한 고개는 아니지만 넘기 힘들고 어려운 곳이다.

 

문화가 달라지고 말투가 달라지지 않지만 험지이고 길의 폭이 과거엔 좁았을 것이고 당연히 비포장이었을 터 ...

 

 

특히 오마치 고개는 1951년 동란 당시 중공군에 의해 차단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3군단 예하의 3사단과 9사단이 지리멸렬 차량과 중화기를 유기한채 장군부터 이등병까지 도망을 갔고 상당수가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다.

 

한겨울도 아닌 5월이었다.

 

여기엔 산 말고도 내린천이라는 강이 장애가 되었고 결국 3군단은 해체가 된다.

 

당시 3군단장은 유재흥 장군이었고 3사단장은 김종오 장군 9사단장은 최 석 장군으로 이들 또한 패전 아니 거의 전멸에 가까운 불명예를 갖게 되었다.

 

당시 박정희 중령은 9사단 참모장이었으나 후송을 가 있어서 무사했다.

 

이 전투를 현리전투라고 하며 국군의 패전 아니 일방적 비극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국군의 지휘부와 장교단의 교육이 강조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중공군 하면 많은 숫자로만 막무가내로 오는 전술을 구사하는 것 같지만 국공내전과 일본군과의 전쟁에서 단련된 군대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현재도 당시 고립되었던 현리엔 3군단 사령부가 있고 당시의 비극을 잊지 않기 위해 사단사령부의 병력들은 년초에 행군을 하며 그날을 상기한다.

 

당시 미군들은 군단을 해체하고 우리군의 지휘권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장교들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힘을 쓴다.

 

패배한 것도 패배한 것이지만 우리군은 미군에게 더 예속되고 무시당하는 지경에 이른다.

 

현재도 우리는 미군이 없으면 여전히 불안한 군대이다.

 

임진왜란 때는 명나라 군대에 의존하고 동학농민운동시기엔 자국의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의 군대를 불러들이기도 한다.

 

이젠 부끄러운 역사를 벗어나 우리의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

 

그리고 과거의 잘못을 저지른 자들의 과오는 철저히 기록해야 하고 지적해야 한다.

 

그 이유는 잘못을 저지른 자들은 사인이 아니고 국가의 녹을 먹던 공직자 즉 공인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오마치 터널의 개통으로 오마치 고개는 차량의 이동이 별로 없어 한산한 편이며 북쪽으로 기린면 지역이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