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동란 전후 육군장교 양성체제

lkjfdc 2018. 12. 23. 14:25

 

 

 

 

 

우리군 특히 육군엔 여러형태의 장교교육기관이 있었다.

 

건군하자 마자 전쟁을 겪었고 많은 수의 군인 특히 그 기간인 장교의 육성은 급하지만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었다.

 

 

1.육군사관학교

 

 

대한민국 정부가 다시 수립되기전 미군정에 의해 군사영어학교가 서대문 감리회 신학교에서 만들어 지며 이들이 남조선국방경비대의 기간이 되며 이 후 태릉에 남조선 국방경비사관학교가 개교하며 1948년 정부가 다시 수립되면서 국방경비대가 대한민국육군이 되면서 이름이 경비사관학교는 육군사관학교가 된다.

 

 

10기(생도 1기)가 4년제 교육을 처음하려고 했으나 생도2기가 4년제 사관학교로 출발을 하는 가? 싶었지만 전쟁이 발발 교육은 중단되고 당시 시흥에 있던 육군 보병학교 생도들과 초기 방어전에 투입 특히 육사생도들은 많은 피를 뿌렸으며 생도 1기만 임관이 되었고 생도2기는 육사역사에서 제외되었다.

 

생도2기는 부산 동래에 만들어진 육군종합학교에 여러 젊은 후보생과 입교 훈련을 받고 전선에 투입되며 육사졸업생이라기 보다는 종합학교 졸업생이 되면서 그 영예와 영광은 전선이 교착상태에서 재개교한 육사 11기에게 넘어가고 이들은 새로운 육사의 선두주자가 되어 업적을 남기지만 신군부 쿠테타의 주역이 되는 전두환 노태우등을 탄생시킨다.

 

 

만약 생도2기가 정상적인 교육은 아니라도 중단기교육을 받고 11기로 인정되어 육사의 교육을 계속 이어 나갔다면 육사의 전통은 일그러지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2. 육군종합학교

 

그리고 육군종합학교는 수많은 장교를 배출했고 이들에 의해 동란시기 다수의 장교가 배출되었으며 그 업적은 지대하다고 생각한다.

 

 

 

3. 육군 보병학교 후보생( 갑종장교라고 한다.을종은 하사관)과 육군 2사관학교 그리고 육군 3사관학교

 

그리고 훗날 육군 보병학교가 광주에서 재개교하여 교육을 실시하나 갑종장교교육은 69년 중단 되고 뒤에 육군 2사관학교가 되며 이는 육군보병학교가 담당한 보병장교의 초군반 고군반 교육이외에 또다른 과정이라 볼 수 있고 갑종장교는 68년 영천에서 만들어진 육군3사관학교 이전에 장교양성을 한 또다른 과정이며 70년대 초 두 학교는 합쳐져 지금의 육군3사관학교로 발전했으니 육군3사관학교의 출발을 60년대 말로 제한하는 것도 좋지만 더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4. 학군사관

 

그리고 60년대 초반 전국의 주요대학에 학훈단 :훗날 학군단 (ROTC)를 설치하였다.

 

초급장교의 확보와 함께 이들이 전역했을 때 예비역으로 초급장교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고 현재 가장 많은 수가 임관을 하며 방학시기에는 괴산에 위치한 중앙군사학교에서 교육을 한다.

 

 

 

5. 육군예비사관학교

 

현재는 ROTC가 전평시를 대비 현역과 예비역장교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막중한 비중이 있다고 평가하는바 동란전 그리고 동란시기 그리고 그 이후엔 어떤 기관이 특히 예비역 육군장교의 교육을 담당했는지 살펴 보겠다.

 

동란이 있기전 정규군 이외에 청년방위대란 예비대가 있었고 이곳의 예비역 소위를 양성하는 교육을 육군보병학교에서 하다 청년방위간부훈련학교에서 앙성하였고 전쟁 발발 이후 폐지되었다.

 

 

그리고 각 중 대학교(당시 중학교는 오늘날 중고교 과정을 합친 6년제) 체육교사를 육사에서 교육하여 예비역소위로 임관시키기도 했었다.

 

전쟁이 발발한 후 교육이 중단되고 다시 전세가 회복 되었을 때 점령지의 치안과 전방에 나간 군대 특히 당시엔 국군 뿐 아니라 유엔군의 주력인 미군을 보조할 근무지원단이 필요했고 이들은 주로 민간인 노무자로 이들을 지휘감독할 장교들이 있어야 했다.

 

인사명령은 육군본부에서 하지만 작전과 군수는 미8군이 하는 부대가 창설되는데 여기에 필요한 장교들을 양성하는 학교가 바로 육군예비사관학교로 경주에서 창설되며 18주간 교육을 받고 예비역소위로 임관하여 주로 각지역 근무사단에 배치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후방이라하더라도 지리산에서 공비토벌에 투입되어 전사한 경우도 있었고 또 어떤 장교들은 전방에 서 직접 전투를 하지 않았지만 근무지원을 담당하였고 이 임무도 위험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52년 부터 예비역 신분에서 현역으로 전환하여 임무를 수행하게 하고 53년 종전 이후엔 현역으로 전환 하였으나 계급은 여전히 소위였다.

 

그리고 현역이 된 장교들은 휴전이후 각 부대에서 직업군인의 길을 간 경우도 있고 장기복무를 하기도 했으며 베트남전에도 참전했다.

 

그러나 예비역으로 동란시기 임무를 수행한 시기를 제외시켜 논란이 되기도 했었다.

 

 

현재는 ROTC제도가 있어 예비군 지휘자와 지휘관의 확보가 원할 하지만 당시엔 육군예비사관학교가 있어 그 기능을 수행했다고 생각한다.

 

동란시기 길지 않지만 4000여명 넘게 장교를 양성하여 전후방 각지에 보내 임무를 수행하게 하고 휴전 이 후 현역장교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큰 역할을 분들을 양성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육군예비사관학교'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학사장교나 특수사관 같은 양성과정은 훗날 이야기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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