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이야기

동란 당시의 육군장교 양성과 예비병력

lkjfdc 2018. 2. 13. 09:37

 

 

 

 

 

 

들어가는 글

 

 

현재 우리나라 국군의 주력인 육군장교 양성은 육군사관학교를 기간으로 육군3사관학교 그리고 학군사관후보생(ROTC) , 학사장교, 병으로 근무하다 다시 교육을 받고 장교가 되는 경우도 있다.

 

가장 숫자가 많은 병력이 학군사관후보생으로 이는 전평시 소대장요원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도입했으며 미국의 제도를 따온 것이다.

 

동란시기엔 다수의 학군장교를 양성하는 제도가 없었다.

 

그러나 유사한 장교양성과정이 있어 극복할 수 있었다.

 

1. 초기 전투에서 육사생도들의 희생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오판)

 

당시 육군사관학교 생도를 포천전투에 보내 희생시키는 세계전사에 유래없는 실책을 저지르고 시흥에 있던 육군보병학교의 장교후보생들을 김포에 출동시켜 침략군을 막으러 갔으나 포천방면 처럼 다수의 희생은 없었다.

 

 

 

2. 현지 임관 장교들의 희생

그 후 육사나 보병학교의 구분 없이 육군종합학교를 개교하여 장교를 6000여명 양성하여 전선에 보냈으나 그들이 양성되기전 하사관들은 현지 임관 약 4000여명이 소위로 임관 다수의 희생을 치뤄 초기 수많은 북한인민군 병력과 화력 그리고 앞도적인 장비를 몸으로 틀어 막았다. 이분들이 육사의 8기 이후 기수들과 말단 단위부대에서 많이 전사했다.

 

종합학교를 졸업한 장교들은 임관후 병과에 따라 교육을 추가로 받거나 바로 전선에 투입되며 당시 새롭게 창설되는 9사단 11사단의 기간요원이 되기도 한다.

 

 

3.북진 이후 그리고 1.4후퇴 교착 현전선에서 고지전 진지전 국민방위군과 동란전 호국군과 학도호국단

 

우리는 보통 낙동강과 청천강 압록강으로 밀렸다 올라가는 기간이 길다고 생각하는데 동란시기의 2/3기간은 현재 휴전선 근방에서 고지전과 진지전으로 1953년까지 무려 2년여를 싸웠는데 이기간 12사단 15사단 20사단 21사단 25사단이 만들어 진다.

 

 

아무튼 군군과 UN군의 북진이후와 전선고착 이후 후방의 안정을 위해 국민방위군을 조직하는데 당시 병력을 소집하였으나 그들의 식량과 운영비를 착복 대규모병력이 굶주림과 고통으로 죽고 관련자들을 처벌한 일도 있었다.

 

물론 6.25전 호국군이라고 하여 예비군을 두고 49년에는 지금의 광역자치단체 단위로 호국군 연대가 창설되어 예하 대대 중대 소대까지 현역장교가 배치된 적이 있고 호국군사관학교가 있었고 500여명의 호국군소위를 배출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호국군은 그해 8월 없어진다.

 

그 후 청년방위대 20만명을 조직 여기에 필요한 간부를 양성코저 방위간부훈련학교를 개설 방위 소위로 임관시키고 보수교육을 이 학교에서 실시 간부도 임용하였으며 각 지방에 청년방위단 (사단급)부터 소대까지 편성했으나 전쟁이 발발하자 무장없는 청년방위대는 분산되고 병력을 소집하게 되자 다시 동원되게 된다.

 

그리고 중학교(지금의 중고교)와 대학에 학도호국단이 있어 체육교사들은 육사에 입교 군사교육을 받고 예비역 소위로 임관되었다.

 

당시 중학교 학생이 약 40여만명 대학생이 3만명 군사훈련을 했으니 영화에서 보듯 총도 못잡는 어눌한 학생은 설득력이 없고 이들은 자발적인 학도병도 있었고 북한에 의해 청년과 학생들을 의용군으로 징집하게 하여 국군에게 총을 겨눴고 대한민국 정부는 학생과 청년들을 현역병으로 동원하여 전쟁에 나서게 했다.

 

 

 

4. 후방의 향토 보병사단의 창설과 육군예비사관학교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건군초기 있던 수도,1, 2. 3. 5. 6.7.8 사단이나 1군단 2군단 3군단처럼 전방사단이나 군단 이외에 후방지역을 담당한 5군단이 만들어져102사단(105,106,107연대 ) 106사단(115,116,117연대) 독립 110연대라는 부대가 있어 입대장정의 훈련 그리고 공비토벌이 가능했으나 해체후 이들은 차차 보충연대로 전환하기도 하고 전방사단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병참이나 수송을 담당하는 부대를 창설하는데 제 101근무사단 , 103근무사단, 105근무사단이 있어 각 사단에 6개 연대가 편성 총 18개 연대가 전방사단의 뒤에서 미군의 작전지시를 받아 근무지원을 했었고 이들은 민간인을 노무자로 편성 근무부 장병의 지휘 감독을 받게했다.

 

당시 전쟁은 군인들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수많은 민간인들의 희생이 있어 가능했다.

 

앞서 말했던 국민방위군은 많은 문제를 발생 창설된지 6개월만에 해체되고 이곳의 간부를 양성하던 국민방위군 사관학교 학생들을 새롭게 만든 '육군예비사관학교'에 입교시키는데 이 학교에서 현지임관을 앞둔 하사관을 재교육하기도 하였다.

 

 

예비역으로 졸업을 하지만 이들은 현역으로 전환되어 전장으로 달려 갔으며 나이도 다양했고 직업도 다양했기에 여러 병과에서 활약을 한다.

 

 

우리는 보통 장교의 배출이 육군사관학교에서만 이루워졌다고 보는데 전쟁이 발발한 이후 생도1기까지만 배출이 되고 진정한 의미의 4년제 입학생 생도 2기는 육군 종합학교로 입교 육사에서는 잊혀진 존재였고 이들은 전쟁이 끝나 자신들의 명예와 출신을 다시 찾고자 노력했으나 육사에서는 인정해 주지 않았고 심지어는 임관기수가 한참 늦은 육사11기에게 모든 명예를 내주고 전쟁에도 참여하여 피를 뿌렸지만 79년에는 후배들에게 눌리고 군경력과 전쟁경험이 많음에도(임관 년도가 4~5년 차이가 남에도) 70년대 후반부터 장군진급에서 밀리는 불운을 겪었다.

 

지금은 육사에서 졸업을 인정해준 것으로 알고 있다. 생도2는 불행한 기수였지만 이들이 육사11기를 견제하고 선배답게 장악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수 있도록 해야 했고 그 위의 선배들 또한 육사11기가 실세로 날뛰지 못하도록 해야 했으나 당시 군부는 이들을 키워 주었으며 5.16때 부터 그 기반은 탄탄 했었다고 본다.

 

 

아무튼 동란이 발발하자 초급장교를 양성하고자 만들어진 기관에 육군종합학교와 일반인은 물론 군관계자도 잘모르는 '육군예비사관학교'를 우리는 기억해야 하며 현지 임관을 하여 피를 뿌린 당시 하사관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당시 대한민국의 청년들 특히 학생들은 군사적 훈련을 전혀 받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고 나름 조직화되고 그들을 지도하던 교사들이 예비역 장교였다는 것을 잊지말았으면 한다.

 

5. 결론

 

다음으로 남북한의 대화는 대화이고 과거의 불행한 역사는 알고 있어야 한다.

 

이는 갈등을 조장하거나 적대적 감정을 부추기고자 함이 아니고 다시는 이런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의 표현이다.

 

 

당시 북한의 침공으로 푸른 꿈을 잃고 고인이 된 분들이 많았음을 알아야 하며 그 원인에는 북한정부와 군부에 일차적 책임이 있지만 각자 자신의 이익에만 집중하고 외세에 의존했던 이땅의 지도자라고 말하던 사람들과 정치인들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싸운 국민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도록 특히 정치인들과 자칭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똑바로 해야 하고 깨어난 국민들은 그들이 재물과 명예욕 때문에 갈등을 부추겨 국론을 분열시키는 행동을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해방이후의 건군사는 군의 역사이기 전에 다시 한번 돌아봐야할 대한민국의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때문에 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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